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관악산 낙성대공원

관악산 낙성대공원

2026-03-11

서울특별시 관악구 낙성대로 77

낙성대공원은 고려의 명장 인헌공 강감찬 장군(948년∼1031년)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곳으로 장군이 태어날 때 출생지에 큰 별이 떨어졌다는 전설에 따라붙은 이름이다. 1973년 서울특별시에서 주변 지역을 정돈하여 사당과 부속건물을 조성하였다. 공원 동쪽에 사당을 지어 안국사라 하여 장군의 영정을 모셨고 정면에는 외삼문인 안국문과 내삼문을 세웠다. 안국사는 고려시대 목조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을 본떠 세웠으며 팔각 청기와 지붕이 올려져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문 안에는 낙성대 3층석탑을 강감찬 장군 생가터에서 옮겨왔으며, 탑 맞은편에는 사적비를 세워놓았다. 공원은 울창한 숲을 이루고 계절 따라 꽃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들어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자작나무숲, 소나무숲, 참나무숲, 사시나무 군락지, 전나무숲 등이 형성되어 있으며 산책로의 길이는 총 3㎞에 이른다. 그 외에도 연못과 야외놀이마당, 야외예식장도 있다. 위치가 서울대학교 후문으로 통하는 길과 인접해 있기 때문에 찾는 사람이 많아 서울 남부지역의 명소가 되고 있다.

광화문

광화문

2025-12-10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광화문은 경복궁의 남문이며, 궁성의 정문이다. 광화문은 국왕이 드나드는 정문이기도 했지만,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었기 때문에 다른 궁궐의 정문에 비해 그 규모와 격식 면에서도 매우 웅장하고 화려했다. 또한 광화문은 담장 끝 동쪽과 서쪽에 각각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을 두어 조선의 5대 궁궐 가운데 유일하게 궐문 형식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 광화문은 중층으로 된 문루를 받치는 기단석축에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앙의 홍예로는 왕이,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하도록 하였다. 문루(門樓)에는 종을 걸어 때를 알리는 데 사용하였다. 이처럼 경복궁이 조선왕조의 법궁이라는 점은 광화문을 비롯한 성문의 형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궁의 문들은 낮은 단 위에 문을 세우지만 경복궁의 문은 돌로 높은 석축을 쌓고 중앙에 홍예문을 내서 마치 성곽의 문과 같은 모습을 취한다. 광화문은 그중에서도 홍예문을 셋이나 내서 가장 격식 높은 모습을 보여준다. 광화문이 법궁의 정문이라는 사실을 잘 드러내준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특별한 이름이 없이 궁제에 따라 ‘오문(午門)’으로 부르다가, 태조 3년(1395) 정도전에 의해 ‘정문(正門)’으로 이름을 바꾸지만, 세종 8년(1426)에 경복궁을 수리하면서 집현전에서 ‘광화문(光化門)’이라 이름을 지어 올리면서 지금의 광화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원래 광화문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지으면서 궁성의 동문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겼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문루가 부서지고 석축은 탄흔투성이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광화문이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된 것은 1968년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서다. 파괴된 문루를 다시 짓고 광화문을 현재의 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 재건한 광화문은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졌으며, 재건 당시 광화문의 축을 경복궁의 중심축에 맞춘 것이 아니라 당시 중앙청으로 쓰이던 구 조선총독부 청사의 축에 맞추어, 그 결과 3.5도가량 본래의 축과 어긋나게 틀어지고 말았다. 그 뿐만 아니라 원래의 광화문 자리에서도 14.5미터가량 뒤로 물러나 지금의 자리에 서있게 되었다. 이렇게 원형을 잃어버린 광화문을 복원하고자 2006년부터 광화문 철거작업을 시작해 3년 8개월의 복원 공사를 마치고 2010년 8월 15일 완공되었다. 화강암으로 육중한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이층의 문루를 얹어 멀리 조망하기 좋을 뿐 아니라 궁궐 정문으로서의 위엄을 나타내고 있다. 기단에 있는 3개의 아치형 출입문은 경복궁이 조선의 정궁이라는 위엄을 과시한다. 돌로 만든 기단 위에는 흙을 구워 벽돌처럼 만든 ‘전돌’로 나지막한 담을 둘렀는데, 여기를 장식한 팔괘 문양은 조선조 궁궐의 특성을 잘 반영하고 있다.

창경궁

창경궁

2025-11-14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와룡동)

창경궁(昌慶宮)은 성종이 세 명의 대비를 위해 옛 수강궁에 창건한 궁이다. 창경궁은 원래 1418년(세종 즉위) 세종이 상왕 태종을 위해 창건한 수강궁(壽康宮)이 있던 자리이다. 이후 1483년(성종 14) 성종이 세 명의 대비인 세조의 왕비 정희왕후, 덕종의 왕비 소혜왕후,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를 위해 수강궁을 크게 확장하고 궁의 이름을 창경궁이라 하였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경계 없이 동궐(東闕)이라는 하나의 궁궐 영역이었으며, 주로 왕실 가족들의 생활공간으로 사용하였다. 창경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616년(광해군 8) 중건하였으며, 1830년(순조 30) 대화재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소실되었다가 4년 뒤에 중건하였다. 그러나 1907년 순종이 황위에 오른 후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조성하면서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기 시작하였다. 1911년에는 일제에 의해 궁의 이름마저 창경원(昌慶苑)으로 격하되어 궁궐이 아닌 공원화가 되어 훼손이 심하였다. 광복 후 1983년에 다시 창경궁으로 명칭을 회복한 후 궁궐 경내에 있던 동물원을 이전하고 본래 궁궐의 모습으로 복원공사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창경궁은 남향으로 있는 다른 궁궐과 달리 정문과 정전이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종묘 [유네스코 세계유산]

2025-09-11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57 (훈정동)

종묘(宗廟)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역대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다. 종묘에는 본래의 건물인 정전과 별도의 사당인 영녕전을 비롯하여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 ‘궁궐을 기준으로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을 세운다’는 예에 따라 현재의 자리에 종묘를 창건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정전만 있어서 ‘대묘, 태묘, 종묘’라고 불렀다. 조선은 제후국으로 5묘제(五廟制)의 예에 따라 개국시조(태조)와 재위 중인 왕의 4대 조상(고조·증조·조·부)을 모시는 제도로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그러다가 세종대에 5묘제에 따라 태조를 제외하고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를 두고 여러 차례 논의한 끝에 정전 옆에 새로운 별묘(別廟)를 지어 그 이름을 ‘영녕전’이라 하였다. 4대가 지난 왕의 신주는 모두 영녕전으로 옮겨 모셨다가, 연산군 대에 ‘세실(世室, 대대로 정전에 신주를 모심)’과 ‘조천(祧遷, 영녕전으로 신주를 옮김)’의 예로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이러한 예에 따라 3년상(27개월)이 끝난 왕과 왕비의 부묘례(祔廟禮,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의식) 때 정전에 처음 신주가 모셔지고, 이후 ‘세실’ 또는 ‘조천’으로 정하여 정전과 영녕전에 각각 신주를 모시게 되었다. 모시는 신주가 늘어나면서 신실이 몇 차례 증축이 되어 현재의 정전 19칸, 영녕전 16칸의 규모가 되었다. 그 밖에 종묘 경내에는 망묘루(望廟樓, 종묘서(宗廟署)의 관원들이 제례에 관한 업무를 보던 곳), 향대청(香大廳, 향과 축문을 보관하는 곳), 재궁(齋宮, 왕과 세자가 제사를 올릴 준비를 하던 곳), 전사청(典祀廳, 제사의 음식을 마련하는 곳) 등의 건물이 있다.

덕수궁

덕수궁

2026-05-21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덕수궁은 1897년에 선포된 황제국,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옛 이름은 경운궁이다. 덕수궁은 원래 조선 제 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사저였고, 그 후에도 월산대군의 후손이 살던 곳이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들이 모두 소실되자 1593년(선조 26)부터 임시 궁궐로 사용하여 정릉동 행궁(貞陵洞 行宮)이라 불렸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경운궁(慶運宮)으로 이름이 정해지면서 정식 궁궐이 되었다가, 창덕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별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대한제국의 황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황궁에 맞게 규모를 확장하고 격식을 높였으며, 궁궐 내 서양식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전통 건축물과 서양식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1904년(광무 8) 대화재로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고종이 황위에서 물러나자 궁의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는 덕수궁의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대부분의 건물들이 철거되었다. 동시에 공원화가 진행되어 궁궐로서의 면모를 잃게 되었다. 1946~47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제1·2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덕수궁의 복원이 꾸준히 이루어져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경복궁

경복궁

2026-05-20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은 1392년 조선 건국 후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다. 경복궁은 백악산(북악산)을 주산으로 넓은 지형에 건물을 배치하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넓은 육조거리가 펼쳐진 한양의 중심이었다. ‘경복’의 이름은 ‘새 왕조가 큰 복을 누려 번영할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으며, 이곳에서 세종 대에 훈민정음이 창제되어 반포되기도 하였다. 또한, 동궐(창덕궁)이나 서궐(경희궁)에 비해 위치가 북쪽에 있어 ‘북궐’이라 불리기도 했다.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가진 왕들을 보면 제2대 정종, 제4대 세종, 제6대 단종, 제7대 세조, 제9대 성종, 제11대 중종, 제13대 명종 등이 있다. 경복궁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는데, 그 후 복구되지 못하였다가 270여 년이 지난 1867년(고종 4)에 다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들어 건청궁과 태원전, 집옥재 등이 조성되었으며, 특히 건청궁 옥호루는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1910년 경술국치 후 경복궁은 계획적으로 훼손되기 시작하여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철거되었고, 1926년에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어 경복궁의 경관을 훼손하였다. 이후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되었고,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였으며 흥례문 일원, 침전 권역, 건청궁과 태원전, 그리고 광화문 등이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복궁에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경회루와 향원정의 연못이 원형대로 남아 있으며, 근정전의 월대와 조각상들은 당시의 조각미술을 대표한다. 현재 흥례문 밖 서편에는 국립고궁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고, 경복궁 내 향원정의 동편에는 국립민속 박물관이 위치하고 있다. 경복궁의 주요 문화재로는 사적 경복궁, 국보 경복궁 근정전, 국보 경복궁 경회루, 보물 경복궁 자경전, 보물 경복궁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경복궁 아미산굴뚝, 보물 경복궁 근정문 및 행각, 보물 경복궁 풍기대 등이 있다. ◎ 한류의 매력을 만나는 여행 정보 미국의 국민 TV 쇼 ‘더 투나잇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서는 ‘BTS위크’라는 이름을 붙여 닷새간 BTS 특별 방송을 진행했는데, 그중 BTS가 ‘맵 오브 더 솔 : 페르소나’ 미니앨범 수록곡 ‘소우주’와 ‘IDOL’을 부른 장소가 화제다. 그 장소는 바로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인 ‘경복궁’의 경회루와 근정전이다. 보랏빛 조명에 아름답게 빛나던 경복궁에서 한국의 과거를 체험해 보길 추천한다.

화계사(서울)

화계사(서울)

2026-03-18

서울특별시 강북구 화계사길 117 (수유동)

화계사는 원래 부허동이라는 곳의 보덕암이라는 암자였으나 그 후 보덕암을 중종 17년(1522)에 남쪽 화계동으로 옮겨 법당과 요사채를 짓고 화계사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 광해군 10년인 1618년 화재로 모두 소실되었다가 다음 해에 도월스님에 의해 중건되었다. 북한산의 핵심인 삼각산의 동남쪽 칼바위 능선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도심과 가깝고 주택가와 인접해 있으면서도 숲과 계곡이 감싸 안아 자연에서 주는 편안함과 고즈넉한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강북구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특히, 화계사는 숭산스님에 의해 시작된 관음국제선원의 산실로서 외국인 승려들과 불자들이 이곳에서 수행하고 있는 참선수행과 국제포교의 중심사찰이기도 하다. 화계사에서는 매일 사시 예불 및 기도가 있으며 매주 일요일에는 가족 법회가 봉행되고 있다. 화계사는 교육의 도량이기도 하다. 화계사불교대학은 2002년 인가를 시작으로 매년 700여 명의 불자들이 교육받고 있다. 기초교리 과정과 천수경, 예불, 반야심경과 의식 등을 배우는 교양과정이 각 3개월간 진행되며 2년 과정의 불교대학을 주간·주말반으로 나누어 실시하고 대학원과 경전반을 각 1년 과정으로 실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도회, 청년회, 나한대학생법회, 학생회, 어린이회 등의 신행 단체와 신도회 안에 거사회, 합창단 각종 봉사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흥천사

흥천사

2026-01-22

서울특별시 성북구 흥천사길 29 (돈암동)

최초 흥천사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왕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1396년, 지금의 정동 일대에 창건한 사찰이다. 1397년에 완공된 흥천사는 170여 칸에 달하는 큰 규모였고, 이듬해에는 북쪽에 사리전도 세워졌다. 흥천사는 조선시대 억불정책 속에서도 왕실의 지원을 받으며 유지되어 왔다. 왕실의 제사와 치병 기도, 가뭄 때는 기우제등이 열리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연산군 때 큰 화재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탔고, 선조 2년(1569년)에는 함취정 자리로 옮겨 ‘신흥사’로 불렸다. 이후 정조 18년(1794년)에 다시 현재 자리로 옮겨 중창되었다. 고종 2년(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의 지원으로 절이 크게 고쳐졌고, 본래 이름인 ‘흥천사’를 되찾았다. 이때 대원군이 직접 쓴 흥천사 현판은 지금도 전해지며 사찰의 역사를 보여주는 소중한 유물이다.

봉은사(서울)

봉은사(서울)

2026-03-09

서울특별시 강남구 봉은사로 531 (삼성동)

봉은사는 서울의 중심지인 강남구 삼성동에 자리 잡은 천년고찰이다. 794년 연화국사가 창건하였고 처음엔 견성사라고 하였다. 이후 1498년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성종의 능(선릉) 동편에 있던 이 절을 크게 중창하고 절 이름을 봉은사로 바꿨다. 조선조에는 조계종을 대표하는 선종 수사찰로, 근대에는 역경사업과 도제를 양성했던 동국역경원이 세워진 터전이다. 오늘날 봉은사는 수행 중심의 사찰 운영으로 새로운 불교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비롯한 불교대학, 경전학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국내외적으로 양질의 한국불교문화를 널리 알리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복지 또한 실현하는 도심 대찰의 위상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승가사(서울)

2025-07-21

서울특별시 종로구 비봉4길 213 (구기동)

승가사는 신라 낭적사의 수태스님이 관음보살의 화신이라고 존경받던 서역 승려인 승가대사의 거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이다. 삼각산 남쪽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암벽을 뚫어 승가대사의 상(보물 제1000호)을 봉안하였는데, 고려시대 이예가 쓴 『삼각산중수승가굴기』에 승가사 창건의 경위가 대략 실려 있다. 또한 고려시대 왕실의 지원을 받아 조성된 절 뒤편 암벽의 마애불(보물 제215호)은 고려 초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나라에 큰 난리나 재해가 있을 때 왕이 친히 이 마애불 앞에 나아가 기도하며 국가의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특히 불교가 억압당하던 조선 초에는 함허스님이 이곳에서 득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 후기에는 성원스님이 마애불 앞에서 신묘장구대다라니(神妙章句大陀羅尼, 탐욕·노여움·어리석음을 없애고 깨달음에 이르게 해 달라는 주문)를 꾸준히 외워 득도하는 등 수많은 고승들이 배출되어 중생을 제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중생의 기도처였던 승가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제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하지만 종단정화를 계기로 1955년부터 도원·상륜·정호스님이 연이어 주지를 맡아 도량을 새롭게 꾸며 과거의 명성을 찾아가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