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5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향나무는 상나무 또는 노송나무로 부르기도 하며, 약 20m까지 자란다. 향나무 줄기의 단단한 부분은 강한 향기를 내는데, 이것을 불에 태우면 진한 향기를 내르모 제사 때 향을 피우는 용도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의성 사촌리 향나무는 의성 지역에서 고택으로 유명한 만취당 앞 골목에 심겨 있고, 나이는 500년 정도로 추정된다. 높이는 8m, 줄기의 폭은 25m 정도이다. 나무의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향나무의 줄기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모양을 하고 있다. 이 향나무는 조선 중기의 시인이었던 송은 김광수가 심은 것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만년 동안 푸르게 살라는 의미를 붙여 만년송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의성 사촌리 향나무는 오랜 세월 사람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서 지내온 나무로, 현재는 안동 김씨 만취당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2025-11-05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만취당길 17
만취당은 퇴계 이황의 제자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이 학문을 닦고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이곳을 찾은 온계 이해, 서애 류성룡 등 많은 인사들의 시문이 남아 있으며, 현판은 석봉 한호의 친필이다. 건립연대는 만취당 중수기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582년(선조15)에 짓기 시작하여 1584년에 완공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후 1711년(숙종 37) 연목을 일부 교체하였고, 1727년(영조 3) 동쪽으로 2칸을 증축하였으며(復齋), 1764년(영조 40) 서쪽으로 1칸 온돌방을 증축(西小翼室)하여 현재와 같은 T자형 평면이 완성되었다. 만취당은 도리와 대량의 구조결구법 등 초창 당시의 건축수법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6세기 사대부가의 주거 및 선비문화 그리고 사회적 요구에 따른 건축적 변화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025-10-23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서리
회나무는 잎이 지는 나무로, 8월에 황백색 꽃이 피며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회나무는 예로부터 귀하게 취급되어 집안에 행복이 찾아온다고 믿어 우리나라에 즐겨 심었던 민속나무이다. 의성읍 도서동의 회나무의 나이는 600년 정도로 추정하며, 높이는 18m, 둘레는 10m 정도이다. 옛날에 치질약에 좋다 하여 나무껍질을 벗겨가서 동쪽과 북서쪽에만 껍질이 남아있다. 가지가 지상으로부터 3m 되는 지점에서 세 갈래로 갈라져 있다. 가운데 있는 가지는 말라죽었으며, 동쪽과 서쪽에 있는 가지만 살아있다. 나무의 밑동 부분은 썩어서 큰 구멍이 나 있는 상태이다. 1919년 조선총독부 이름으로 출판된 『조선거수노수명목지』에는 남북한을 통틀어 208건의 회화나무 중 도서동의 회나무나 가슴 높이의 둘레가 가장 크다고 적혀 있다. 또 1972년에 발간된 『보호수지』에 실려 있는 360건 중에서도 단연코 1위였다. 도서동의 회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속에 살아온 나무이며, 회나무 중에서 둘레가 매우 크고 높은 나무로 생물학적 보존가치가 높아 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나무 아래에서는 당산제가 열리기도 한다.
2025-10-23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수정사길 19
의성 산운생태공원은 2006년 산운 초등학교(폐교)를 활용하여 자라나는 세대의 자연학습 및 환경에 대한 가치관 형성을 위해 건립된 곳이다. 주요 시설로는 생태관, 연못, 분수, 목교, 관찰데크 등이 있으며, 넓은 마당에는 50여 종에 이르는 나무와 풀, 꽃들이 식재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서는 지진과 화산 활동, 생명의 기원과 지구의 탄생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고 있고, 제2전시실에서는 인류의 진화 과정과 동식물의 분류별 종류를 알 수 있다. 제3전시실에서는 공룡 화석과 공룡의 연대기를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의성군의 유래와 특산품,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생태관과 산운마을의 유래를 전시하는 마을 자료관 등이 있다.
2025-10-23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동부로 2545
문익점 면작기념비는 1935년 문익점의 목화 재배를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다. 문익점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1363년 원나라에 갔다가 고려로 귀국할 때 김룡을 시켜 목화 몇 송이를 딴 후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장인과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 기술을 몰라 겨우 한 그루만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성공적으로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문익점 손자 문승로가 의성 현령으로 있을 때, 의성군의 지세가 중국의 금주성과 흡사하여 재파(다시 파종하는 것) 하였다고 한다. 문익점의 자손이 의성 땅에 목화 재배를 시작한 경위와 목화를 처음 원나라에서 수입해 온 조상의 공적을 기리고자 의성 목화재배지에 비문을 짓고 문익점 목면유전비를 세웠다. 그 후 현 위치인 금성면 대리리에 별도의 기념비인 문익점 면작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이는 일제강점기 면작을 독려하는 시책에 따라 세운 것이라고 한다.
2025-10-28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의성 경덕왕릉은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에 위치하고 있는 고분군 중에 조문국 경덕왕릉이라고 추정되는 무덤이다. 조문국은 삼한시대의 부족국가였던 나라로 현재의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일대를 도읍지로 하여 존속하다가 185년에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조문국이 실재했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에 짧게 언급되어 있을 뿐 문헌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옛 조문국 경덕왕릉은 그 형식이 전통적인 고분으로서 봉 아래 화강석 비석과 상석이 있다. 능의 둘레가 74m, 높이가 8m이며 능의 정면에는 가로 42㎝, 세로 22㎝, 높이 1.6m의 비석이 서있다. 1725년 현령 이우신이 경덕왕릉을 증축하고 하마비 등을 세웠다고 하는데 그때부터 왕릉 제사를 지내오다가 일제강점기에 중단되었고, 그 후 경덕왕릉보존회가 구성되어 다시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묘역은 조문국경덕왕릉이라고 쓰인 비석과 문인석, 장명등, 상석으로 단장되어 있다. 옆에는 조문국 고분 전시관이 있다. 조문국 고분 전시관은 원래 대리리 2호분이 있던 자리로 발굴조사를 끝낸 후 무덤 내부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고자 전시관을 건립하였다. 당시의 유물 및 매장 풍습을 눈으로 보며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2호분에서 출토된 유물들도 같이 전시되어 있다.
2025-03-16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의림로 382
모과나무는 본래 중국이 원산지이며 우리나라 전역에서 과수, 또는 관상용으로 오래전부터 심어온 나무이다. 꽃은 5월에 연한 홍색으로 피며, 열매는 원형 또는 타원형으로 9월에 황색으로 익는데 향기와 맛이 그윽하다. 창원 인곡리 모과나무의 나이는 약 250년이며, 높이 10m, 둘레 33m로 의림사 대웅전 앞 뜰에 자라고 있다. 나무줄기가 근육 모양으로 울퉁불퉁하게 골이 파여 있는데, 오래된 모과나무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또한 작은 가지들이 불규칙하게 많이 나 있다. 인곡리 모과나무는 오래되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옛날부터 의림사를 찾는 많은 신도들의 신앙대상이 되고 있다.
2025-11-11
경상남도 창원시 자산동
경상남도 마산시 무학산 남쪽 기슭의 낮은 야산 계곡을 둘러 쌓고 있는 산성이다. 이곳에 서면 남서쪽으로 마산만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북동쪽으로는 창원의 평야지대를 살펴볼 수 있다. 이곳 주민들은 자산산성(玆山山城)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실제로는 옛 회원현의 관아건물이 있던 곳으로 행정상의 구실과 군사상의 구실을 겸한 유서깊은 곳이다. 성벽은 야산 능선을 따라 둘러져 있다. 주로 흙을 다져서 쌓았는데, 성벽 안팎의 끝 부분은 돌을 쌓아 마무리하였다. 성문은 북쪽의 것이 남아있으며 일반 성벽에 정사각형의 입구를 내고 안쪽에 기둥을 세워 문을 단 형태이다.
2025-10-23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적상면 치목길 83
적상산 동남쪽 양지 바른 곳에 위치하며 적상산 산성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마을 남쪽으로 우뚝 솟은 단지붕과 그 주변의 울창한 수림이 풍치를 이룬다 하여 치목(致木)이라 하였다고 한다. 치목마을 뒷산 깊은 계곡에 위치한 송대폭포를 지나 양수발전소 상부댐에 오르면,조선실록을 봉안했던 적상산사고가 복원되어 있고,더 위로 올라가면 본래 사고지 수호를 위해 건립되었다가 1949년 여순사건의 병화로 불타버린 흔적만 남은 호국사지에 안국사(安國寺)가 이건되어 있다.
2025-10-23
전북특별자치도 무주군 설천면 구천동로 1868-30
서벽정은 조선 말기 대사헌의 벼슬에 올랐던 연재 송병선이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고 은둔생활을 하던 중 이 고장을 찾아왔다가 구천동의 아름다움에 반해 이곳에다 집을 짓고 머물면서 영·호남의 선비들과 시국을 논하며 후진을 양성하던 곳이다. 구조는 막돌로 쌓은 석축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세운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주심포집이다. 정면 좌·우측 1칸씩은 누각처럼 바닥을 기둥 가운데에 올려 앉혔는데, 좌측은 높고 우측은 낮다. 전체적으로 단아한 사대부의 재실 모습을 지녔다. 한때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고종 28년(1891)에 재건하였으며, 한국전쟁 때에는 북한군의 숙영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고종 광무(光武) 원년(1897)에 무주 군수 조병유(趙秉瑜)가 주자(朱子)와 송시열의 초상을 봉안하였다. 연제 송병선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망국의 비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로서 충절을 지킨 충신이다. 송병선의 자는 화옥(華屋)이며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9세손이다. 학문과 절제 있는 행동으로 천거받아 좨주(祭酒)에 기용된 뒤 서연관(書筵 官)·경연관(經筵官)·지평(持平)을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이르렀으나 취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벽사설(闢邪說)≫을 지어 양학(洋學)을 배척하고, 일본과의 개국 통상을 반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시정 개혁과 일본에 대한 경계를 건의하여 왕의 동의를 얻었다. 뒤에 다시 대궐에서 왕에게 상소하려다가 경무사(警務使) 윤철규(尹喆圭)에게 속아 일본 헌병대에 의해 고향으로 이송 당하자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음독 자결하였다. 고종에게서 의정(議政)에 추증되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무계만집≫이 있고, 문집으로 ≪연재집≫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