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1-05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고려 말기의 명장으로 고려를 지키려다 처형된 최영 장군의 묘이다. 홍건적을 평정하고 수십 차례에 걸친 왜구의 침입을 막아내는 등 흔들리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명나라에서 철령 이북의 영토를 빼앗으려 하자 요동정벌 계획을 세워 압록강까지 진군하였다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88년 이성계 등의 신진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묘역은 부인 문화 유 씨(文化柳氏)와의 합장묘로 하나의 봉분으로 조성되었다. 묘제는 원형이 변형되었지만, 석물은 옛 것과 새것이 섞여 있다. 봉분은 고려 말기의 전형적인 직사각 형태이고,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아래 부분에 2단으로 둘레석을 조성하였다. 봉분의 정면 왼쪽에는 묘표를 세웠고, 봉분의 정면 오른쪽에는 무민공 충혼비를 세웠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상석·향로석·문석인 등을 조성하였는데 모두 1970년대에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이 묘역은 고려시대의 묘제가 일부 남아있어 학술적 가치가 있다.
2025-03-17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해미향교길 2-13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해미향교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정해현(貞海縣)과 여미현(如美縣)이 해미현(海美縣)으로 합쳐지면서 세웠다. 그 뒤 조선 헌종 10년(1844)에 고쳐 지었고, 1924년에 보수를 하였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 9명과 우리나라 성현 18명 등 27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주변에는 해미읍성, 해미순교성지(여숫골) 등이 있다.
2026-04-21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성지1로 13
이곳은 18세기부터 19세기까지 자행된 천주교 박해 때 충청도 각 고을에서 붙잡혀 온 천주교 신자 1,000여 명이 생매장당한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미 현감이 충청좌도의 국사범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읍성 서문 밖의 돌다리에서 처형하였다. 그런데 1866년 병인박해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자 해미천에 큰 구덩이를 파고 모두 생매장하였다고 한다. 당시 죽음을 앞둔 천주교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기도를 하였는데, 마을 주민들이 이 소리를 (여수머리)로 잘못 알아들어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 후 1935년 서산성당 범바로 신부가 목격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순교자들의 유해 중 일부를 발굴하면서 박해의 전모가 드러났다. 발굴된 유해는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에 이곳으로 다시 옮겨와 보존 중이다.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이 홍보, 모금 활동을 벌여 2003년에 성지를 조성하여, 해미성지성당과 함께 16m 높이의 (해미순교탑), (무명순교자의 묘)를 건립하였다. 2014년에는 로마 교황청이 해미 순교자 3명을 가톨릭교회 공적 공경 대상인 복자로 추대하고 교황 프란체스코가 직접 방문하였다. 이곳은 서산 아라메길 해미국제성지길의 시종점이기도 하다. 해미국제성지길을 따라가면 내포 지역에서 해미로 넘어가는 순교자 압송로였던 한티고개가 있다. 주변에는 그 외에도 해미읍성, 해미향교, 해미시장, 산수저수지 등이 있다.
2025-03-17
충청남도 서산시 향교1로 26
충청남도 지정 기념물 제116호로 지정된 서산향교 경내에 있는 거목이다. 1982년 10월 15일 시나무로 지정되었다. 둘레 430cm, 높이 33m 소유자 및 관리자 서산향교로 되어 있다. 이 나무는 조선 이조정랑 한여현이 지은 우리 지역 최초의 군지인『호산록(1619)』 의 향교조에 선인이 은행나무 네 그루를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들 나무 중 하나로 추정수령이 430년으로 역사가 깊다.
2025-03-19
충청남도 서산시 향교1로 26
서산향교는 조선 태종 6년(1406)에 서문 밖에 세워졌다가 그 뒤 선조 7년(1574)에 군수인 최여림이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 향교 안에 있는 건물로는 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동재·서재, 내삼문, 외삼문이 있다.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중국 유학자 7명과 우리나라 성현 18명 등 25명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배우는 공간인 명륜당은 앞면 8칸, 옆면 2칸 규모로 되어 있다. 명륜당 앞마당에는 조선 정종 때 심었다는 500년 정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이 은행나무는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2025-03-19
충청남도 서산시 성암1로 45 (읍내동)
성암서원은 유숙과 김홍욱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유숙(1324∼1368)은 고려 문신으로 홍건적의 난 때 공을 세워 서령군으로 봉해지고 일등공신 칭호를 받았으나, 공민왕 14년(1365) 그의 충직을 두려워하던 신돈에게 교살당하였다. 김홍욱(1602∼1654)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황해도 관찰사 등 여러 벼슬을 거친 분이다. 효종의 심기를 건드리는 발언으로 죽음에 이르렀는데 ‘언론을 가지고 살인하여 망하지 않은 나라가 있었는가’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숙종 45년(1719)에 세운 이 서원은 경종 1년(1721)에 나라에서 내린 ‘성암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은 사액서원이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924년에 다시 세웠다. 대문 격인 외삼문을 들어서면 동재와 서재가 마주 보게 배치되어 있고, 유숙과 김홍욱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다. 이 서원에서는 해마다 2월과 8월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2025-11-02
충청남도 서산시 동헌로 149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 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청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의 사신이 머물렀던 좌우익실로 구성되어 있다. 서산객사는 본래 지금의 시청인 관아 내에 있었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시청 내에 남아 있는 외동헌과 관아문의 기법과 같은 것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위치로 이전된 것은 일제강점기의 일이다. 현재 남향으로 세워진 이 건물은 앞면 8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잘 다듬어진 화강석 기단 위에 세워졌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자리를 옮긴 이후 서산읍사무소, 서산농촌지도소, 서산문화원으로 사용하다가 1994년에 학계의 고증을 받아 복원, 정비하여 비로소 옛 모습을 찾고 관광지화되었다. 이곳은 서산시청과 가까우므로 원래 관아 위치에 남아있는 외동헌, 관아문도 함께 관람할 수 있다. 그 외에도 주변에 서광사, 서산향교, 서산중앙호수공원 등이 있다.
2025-03-13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이문안길 72-10
1900년대 초에 건립되었으며, 면적은 4,770㎡이다. 일제 강점기의 가옥이며, 향토사적, 건축학적으로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어 2005년 10월 31일 충청남도 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유기방 가옥은 송림이 우거진 낮은 야산을 배경으로 남향하여 자리하고 있다. 북으로 ㅡ자형의 안채와 서측의 행랑채, 동측에는 안채와의 사잇담과 근래에 지은 주택이 안마당을 형성하고 있다. 원래 안채 앞에 중문채가 있던 것을 1988년에 헐어내고 현재와 같이 누각형 대문채를 건립하였다.
2025-03-17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여미리
이 불상은 1970년대에 지금의 위치에서 1㎞ 떨어진 용장천 정비사업 도중 발견되어 지금의 언덕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서 용장천을 따라 5㎞쯤 거슬러 올라간 상류에 2구의 불상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떠내려왔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화강암으로 얼굴과 손등을 조각했는데 옆과 뒷면에는 거친 못 자국이 남았고 목이 부러져 있던 것을 접착하였다. 상부에는 사다리꼴의 얼굴에 관을 쓰고 여기에 작은 부처를 새겼는데 심하게 닳아 있다. 옷은 왼쪽 어깨에서 걸쳐 내려와 형식적인 반원 모양을 그리고 있다. 왼손은 치켜들고 오른손은 아래를 받치고 있다. 전체적인 기법이 형식적이고 입체감이 없어서 고려시대에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제작된 불상으로 생각된다. 이곳은 서산 아라메길 천년미소길이 경유하므로 연계하여 관광해도 좋다. 그 외에도 주변에 유기방가옥, 여미리 비자나무, 달빛미술관 등이 있다.
2026-03-12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정승로88번길 23-73
조선 왕조를 통하여 가장 망명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던 방촌 황희 선생의 묘소이다. 고려 공민왕 1년(1389)에 문과에 급제한 후 성균관학록을 지냈으며, 고려가 멸망하자 한 때 시골에 은거하였으나 조정의 요청과 동료들의 천거로 성균관학관으로 제수되었고, 이후 여러 직책을 두루 맡았다. 그는 태종의 극진한 예우를 받으며 6조의 판서, 대사헌 등 요직을 거치면서 문물과 제도를 정비하여 조선 초기 국가 기반을 확립하는데 큰 업적을 남겼다. 태종 대의 관직생활을 통해 얻은 국정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경험을 토대로, 세종 대에는 20여 년간 나라살림을 총괄하던 의정부에서 외교와 문물제도의 정비, 4군 6진의 개척, 문예진흥 등을 지휘하여 세종성세에 크게 공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