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2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경기도 최북단의 도마치계곡이라 일컫는 곳으로 가평 적목리 방향 시내버스 종점인 용수동 마을에서 3·8교 다리를 지나 무인의 계곡을 한없이 거슬러 오르노라면 노변을 따라 이어진 계곡의 진경에 넋을 잃게 된다. 이곳은 환경청이 고시한 도내 유일의 청정 지역으로 천연기념물인 열목어가 서식하고 있다. 상류로 3㎞ 지점에는 용소라는 소가 있는데 물이 깊고 청명하며 용이 승천하던 것을 임신한 여인이 발견하여 용이 낙상하여 소를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2026-04-30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천안리
용문산전투 전적비는 6·25 당시 가평 지역에서 중공군과 북한군에 맞서 싸운 국군 제5사단, 제6사단 및 미군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이 전투는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제6사단이 혈전 끝에 완전히 섬멸시키고 대승을 거둔 전투로서, 이 전투의 승리를 기점으로 하여 국군과 유엔군이 재반격의 기반을 마련하다. 이 승리는 미 육군사관학교 전술 교본으로 활용될 정도로 전략적 중요성이 큰 전투로 평가받고 있다. 매년 5월 넷째 주 금요일에 전승 기념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2026-03-19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읍내리
영연방참전기념비는 경기도 가평읍 행정복지센터 앞에 공원처럼 자리하고 있다. 한국전쟁 당시 영국·호주·캐나다·뉴질랜드 4개국 장병들이 UN군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파병되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싸운 전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전적 기념비이다. 영연방전투는 1951년 4월 22일부터 4월 25일까지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를 맞아 가평군 북면 일대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의 승리로 서울-춘천 간 도로를 향해 진격하던 중공군을 막아 한국군과 UN군군의 퇴로를 확보하여 막대한 피해를 막아 낸 큰 의미를 지닌 전투이다. 842평의 대지에 1m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높이 12m의 대리석을 사각으로 쌓아 올린 비가 중앙에 있으며 우측에 참전 약사가 한글과 영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의 중앙에는 4개국 국기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 한국 전쟁 참전으로 인한 영연방 군의 희생자 수와 참전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비는 1967년 9월 30일 유엔한국참전국 협회와 가평군민이 힘을 합해 건립하였다. 이곳에서는 매년 4월 말에 영연방 한국참전기념행사가 열린다. 이 행사에 참전하기 위해 4개국의 참전용사와 가족 및 정부 요인 등 200여 명이 방문하고 있다.
2026-03-18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조선 중기 한문 사대가(漢文四大家)의 한 사람인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1635)의 문집 『월사집(月沙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목판이다. 원집(原集) 799판, 별집(別集) 79판, 연보 61판 총 939판으로 구성되어 있다. 크기는 28.0×53.0㎝, 두께 3㎝ 내외이며, 책판의 양 끝에 나무를 끼워 평평하게 하였다. 『월사집』은 최유해(崔有海)에 의하여 1636년 공주에서 처음 간행되었으나 병자호란을 겪으며 소실되었다. 이후 1688년 이정구의 손자 이익상(李翊相)이 경상감영에서 원집과 부록을 간행하였고, 1720년에는 증손 이희조(李喜朝)가 별집을 간행하였다. 연보 목판은 1930년에 새겨졌다. 월사집 목판은 원래 대구 용연사(龍淵寺)에 보관되었다가, 1928년 충북 옥천군 이원면 이원리로 옮겼고, 다시 1987년 4월 현재의 이곳으로 장판각을 지어왔다. 월사집 목판 자체의 의미와 함께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월사의 손자 이은상의 『동리집』, 월사의 6대손 이천보의 『진암집』 도 가평의 장판각에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월사집 목판은 국내외에 잘 알려졌으나 『동리집』과 『진암집』은 제대로 알려지거나 평가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 목판들은 조선시대에 이미 기록으로 남아있었으며 말기까지 그대로 유지된 것이 확인된다. (출처 : 국가유산청)
2025-03-18
경기도 가평군 북면 논남기길 402-19
효자 강영천은 진주 강씨로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 연일 정씨와 함께 살던 중 7세 때 모친이 병으로 몸 져 눕게 되었다. 나이는 비록 어렸으나 효심이 지극하였던 영천은 병든 어머니의 수발을 들던 중 병이 악화되어 정신을 잃자 자신의 손가락을 문지방에 깨트려 피를 내어 입에 흘려놓고 쓰러지고 말았다. 어머니가 깨어나 피를 흘리며 쓰러진 어린 아들을 발견하여 정성껏 간호한 끝에 깨어날 수 있었다. 정문 앞에 걸린 ‘효자업무강영천지문각 강희 39년 경진 3월 15일 입’이라 새겨진 현판으로 보아 이 효자문은 숙종 26년(1700년 3월 15일)에 건립했음을 알 수 있다. 본래의 건물은 290년 가까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멸실된 것을 1987년도에 복원한 것이다.
2025-03-18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방일리
별묘는 남도진(1674 현종 15∼1735 영조11)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설악면 방일리 음방[陰坊]에 있다. 이사당에 모셔진 영정은 가로 120㎝, 세로 200㎝ 크기의 두루마리 표구로 제작되었는데 1728년(영조5년) 6월에 조선 숙종조 시절에 이름이 알렸던 화가 함세휘가 그린 것으로 인물에 대한 선의 감각이 원형대로 잘 보존 되어있다. 이 영정은 그 후 후손들에 의하여 보관되어 오다가 그의 6대손이자 구한말 학자이며 정치가, 외교관으로 이름이 높던 예조판서 남정철(1840-1916년)이 1888년 2월 7일 이곳에 사당을 지어 모시며 매년 칠월칠일 제향을 드려 오다가 1985년 봄에 그 후손들에 의하여 다시 전통가옥으로 부연을 달아 중건한 것이다. 이 영정은 남도진이 쓴 명문과 그의 친구 박창언이 그 아름다움을 예서로 찬미한 글이 있고 조봉주가 찬미한 글과 함세휘가 [戊申六月下院] 무신유월하원에 그렸다는 표시가 있다. (출처 : 가평 문화관광 홈페이지)
2026-03-12
경기 가평군 상면 연하리
이천보고가는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가 살았던 집으로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정면의 사랑채와 오른쪽의 행랑채이다. 사랑채는 동쪽을 향해 있으며, 경기 지방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자형으로 지어졌다. 왼쪽부터 높게 만든 마루인 누마루, 방, 대청, 방, 부엌 순으로 정면 6칸, 옆면 1칸 반의 규모이다. 특히, 누마루 쪽의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부엌 쪽은 맞배지붕으로 서로 다른데 연이어 두 건물이 있는 경우에 보이는 형식이기도 하다. 이천보 고가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순사들이 머무르던 주재소로 사용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 사령부로 쓰였다.
2026-03-18
경기도 가평군 상면 태봉리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1564~1635)는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일컬어지는 문인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며, 윤근수[尹根壽]의 문인이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선생의 묘는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합장[合葬]되어 단분[單墳]으로 조성되었으며, 봉분 아래에는 원형의 호석[護石]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표, 혼유석, 석상, 향로석이 놓여 있으며 좌우로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이 설치되어 있다. 이정구선생 묘 위쪽으로는 손자 이일상[李一相], 아들 이명한[李明漢]의 묘가 조성되어 있다. 묘역 하단에는 이정구, 이명한, 이일상의 신도비가 건립되어 있다. 모두 지붕돌과 네모난 비석 받침의 형태이다. 이정구 신도비는 1656년에 건립되었으며, 김상헌[金尙憲]이 비문을 짓고, 김상용[金尙容]이 전서[篆書]를 썼으며, 이경석[李景奭]이 글씨를 썼다. 1658년에 건립된 이명한 신도비는 비문을 김상헌이 짓고 이경석이 썼으며, 이정영[李正英]이 전서를 썼다. 1703년에 건립된 이일상 신도비는 박세채[朴世采]가 비문을 짓고, 조상우[趙相愚]가 썼으며, 김창협[金昌協]이 전서를 썼다.
2025-10-23
경기도 가평군 상면 연하리
가평군 이천보 고가 내에 위치한 향나무이다. 조선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천보의 선조가 심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향나무는 사계절 푸른 상록성으로 잎이 침형인 키 큰 교목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잘 자랄 수 있다. 정화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예로부터 절간, 묘지 등 신성한 곳에 많이 심겨 왔다. 장소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 건물 주변의 잔디밭에 심거나 가로수로 심고 있으며, 가지가 곧게 또는 구부러지는 모양새를 하고 있어 정원수나 생울타리로 이용하고 있고 분재용으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가평 연하리 향나무는 높이 13m, 수관폭 12m의 우람한 품격을 지니고 있다. 수령은 약 3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이천보 고가 대문이 잠겨있는 경우가 많아 담장 너머로 봐야 한다.
2024-08-08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
조종암은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에 있는 조선 후기 숭명배청 의식을 담아 글씨를 새긴 암벽으로 1684년(숙종 10) 가평 군수 이제두(李齊杜)(1626~1687)와 처사인 허격(許格)(1607~1691), 백해명(白海明) 등에 의해 조성되었다. 세 사람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가 베풀어준 은혜와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부터 받은 굴욕을 잊지 말자는 뜻의 글자를 암벽에 새겨 넣고 ‘조종암’이라 하였다. 조종암 앞에는 S자로 굽이치며 흐르는 조종천이 흐르고 있다. 강물이 여러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기 마련인 것처럼 명나라를 향한 충성심은 변함이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기 위해 조종천 앞의 바위를 선택하여 문자를 새긴 것이다. ‘생각할 때는 어떤 사악함도 없도록 하라’는 뜻의 사무사, 물결이 만 번 굽이쳐도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뜻의 만절필동 재조번방, 날은 저물고 갈 길은 먼데 지극한 아픔이 가슴속에 남아 있다는 뜻의 일모도원 지통재심, 임금을 뵈이는 바위라는 뜻의 조종암 등 22자가 적혀 있고 조종암이란 글자는 다른 글자들과 달리 유일하게 가로로 씌어 있다. 1804년(순조 4) 조진관, 김달순이라는 사람이 조종암의 유래를 적은 기실비를 암벽 앞에 세웠다. 지금은 도로 옆에 덩그러니 바위 무더기가 놓여 있고 조종암 곳곳에 새겨놓은 글자들의 위치와 뜻을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