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오리요리의 거리

오리요리의 거리

2026-03-13

광주광역시 북구 경양로 125

광주 오리요리의 거리는 오리를 적당히 잘라서 익힌 다음에 들깨가루를 섞은 초장에 고기와 미나리를 찍어 먹는 음식점이 밀집된 거리이다.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과 신안동 일대에서 특화된 오리탕의 시초는 1970년대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라남도 나주시 금천면에서 오리농장을 운영하던 한 청년이 보급한 음식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면서 오리로스를 권장하다가 유동에서 식당을 운영하던 전라남도 영광군 출신 주인을 만났다. 청년은 식당 주인에게 자연산 청둥오리 요리법을 전해 듣고 미나리와 들깨가루를 넣어 끓여내는 오리탕을 개발하였다. 저렴한 가격에 오리가 공급되었고, 예측대로 담백한 오리탕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장사가 잘된다는 소문에 오리탕 전문점이 늘어나기 시작하여 지금의 오리요리 거리가 형성되었다. 북구 유동과 신안동 일대에서 오리탕 전문점이 많아질 수 있었던 것은 원재료인 오리 생산지가 인접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1970~1980년대 당시 유동과 신안동은 광주고속터미널과 중앙고속터미널, 광주역이 가까워 시민들과 외지인들의 이동량이 매우 많았다. 이와 같은 지리적 여건을 기반으로 유동 일대에만 30여 개의 오리탕 전문점이 생겨났다. 현재 유동오거리 주변에는 아직도 10여 곳이 성업 중이다. 광주광역시는 북구 경양로 일대를 음식특화거리로 지정하고 ‘광주오리요리의 거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메뉴는 오리탕, 오리로스, 오리주물럭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오리탕의 인기가 가장 좋은데, 다른 지역과 달리 국물 맛이 고소하다는 것이 큰 특징이다. 질그릇으로 만든 냄비나 솥에 된장과 간 고추, 들깻가루, 마늘, 생강 등을 넣고 토막 내 살짝 데친 오리고기를 넣어 4시간 이상 끓인다. 여기에 다시 된장으로 간을 하고 미나리와 대파를 얹어 내놓기 때문에 맛이 담백하다 광주 오리요리의 거리는 광주광역시 북구 유동과 신안동의 경계지역에 자리하며, 중국인과 일본인들도 관광코스에 넣어 찾아올 만큼 이름이 있는 곳이다. 단일 음식이 특정 지역에 군집해 있는 경우는 종종 있으나,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은 오리탕 메뉴로 특화거리를 형성하고 수십 년에 걸쳐 명성을 유지하는 사례는 드물다. 광주 오리요리의 거리는 음식점 군락의 새로운 역사를 쓰고 있다.

청도 합천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청도 합천리 석조아미타여래입상

2025-10-29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합천리

아미타여래는 서쪽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을 뜻한다. 청도군 합천리에는 통일신라시대 천로사 또는 대로사라는 큰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다만 현재는 그 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석조아미타여래입상만 남아 있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1.6m 정도이며, 광배와 부처님을 하나의 돌로 조각한 모습이다. 불상의 손 모양은 오른손을 가슴에 얹어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 옷자락을 잡고 있다. 얼굴은 마모되었지만 둥근 얼굴, 두툼한 나발, 큼직한 육계, 어깨에 닿는 큰 귀, 상체보다 긴 하체 등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사이에 만든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특징이 드러난다.

청도읍성

청도읍성

2025-12-11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동상리

청도읍성은 청도군의 중앙부에 있는 화양읍 선상지에 축성된 남고 북저의 석축성이다. 지방에 읍민을 보호할 목적으로 쌓은 성곽으로 고려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성의 규모는 둘레가 약 2km, 높이가 1.7m이다. 산성과 평지성과의 중간형에 해당하는 평산성으로 평면 형태는 네모꼴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이용해 쌓은 협축벽이다. 임진왜란 때 동, 서, 북문이 소실되고 성벽이 파괴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읍성 철거 정책으로 인해 성벽이 다시 헐리고 문루도 제거되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기저만이 남아 있어 성터 하부의 축조 형태도 알 수 없다. 청도군에서는 매년 3월 [청도읍성 밟기] 행사를 개최한다. 청도읍성 밟기는 부녀자들이 성곽 위에 올라가 산성의 능선을 따라 밟으며 열을 지어 도는 풍속으로, 액운을 쫓고 무병장수하며 극락왕생한다고 한다. 예부터 청도읍성을 한 바퀴 돌면 건강해지고, 두 바퀴 돌면 오래 살고, 세 바퀴 돌면 소원 성취한다는 유래가 전해오고 있다.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

2025-09-09

경상북도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

청도 범곡리 지석묘군은 청동기 시대 무덤 떼이다. 청도군 화양읍 범곡리에 있는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세 군데로 나누어져 있는 고인돌 떼는 솔밭과 경작지 등에 남아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놓은 탁자식과, 땅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되나, 이곳 범곡리에 있는 바둑판식 고인돌로 받침돌이 없는 개석식 고인돌이 무리를 이루어 청도천 주변에 50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동쪽에 22기, 서쪽에 12기가 밀집 분포하고 있다. 이는 청동기시대에 청도천 주변에 정착해 큰 마을을 이루고 생활하던 사람들의 묘로 보이며 기수가 많은 것으로 보아 큰 마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주변의 농경지와 묘지 조성 등으로 일부 손상된 것으로 짐작되지만 비교적 잘 관리되고 있는 고인돌 떼 중 하나이다.

김용학가옥

김용학가옥

2026-04-22

광주광역시 북구 하백로29번길 24 (매곡동)

김용학가옥은 매곡동 하백(荷白) 마을의 언덕진 곳에 자리 잡은 민간 가옥이다. 이 가옥은 살림집과 정자가 조화롭게 배치된 전통 가옥으로 안채와 사랑채, 정자, 연못이 일곽을 이루고 있다. 당시 유지였던 하은 김희수(荷隱 金喜洙)가 1900년대 초에 지은 집으로 아들인 김용학이 고쳐지었다. 지대가 높은 서쪽 언덕에는 정자인 연파정(蓮坡亭)과 하은정(荷隱亭)이 있고, 평지인 동쪽과 남쪽에는 살림집과 연못이 자리 잡고 있다. 사랑채 청풍헌(淸風軒)은 김희수가 1917년에 지었는데, 백암 정사(白菴 精舍)라고도 한다. 정면 7칸, 측면 3칸 구조로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온돌방이 있으며, 건물 뒤쪽으로 마루와 부엌을 증축하였다. 안채는 원래 2층의 초가집이었는데, 김용학이 양옥으로 새로 지었다. 연파정은 김희수가 아버지 김영덕(金永德)을 위해 1918년에 지었으나 화재로 타 버려서 1934년에 다시 지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인데, 비바람을 막기 위해 정자 네 면에 판자 덧문을 달아 놓았고, 내부는 벽이 없는 마루로 터져 있다. 하은정은 김용학이 아버지 김희수를 위해 1933년에 지었다. 정면 5칸, 측면 3칸 구조인데, 정자 바깥에는 유리 덧문이 있고, 내부는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양쪽에 한 칸짜리 온돌방이 있다. 연파정과 하은정은 광주 지역 선비들이 교류하던 문화 공간이었다. 교류하던 학자들이 남긴 시문들이 많이 남아 있다. 김용학 가옥은 하백 마을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김희수, 김용학 일가가 조성한 누정원림(樓亭園林)이자 주거 공간으로 민속·건축학적 가치가 크다.

창석사당

창석사당

2025-09-17

경상북도 상주시 청리면 가천3길 70

창석사당은 창석 이준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56년 창건됐다가 1771년(영조 41)에 월간사당과 함께 체화당이 있는 곳으로 옮겨 세워졌다. 창석사당과 월간사당은 같은 구조로 대문채는 정면 5칸 중 좌측에서부터 문간방, 대문간, 고방, 방, 부엌의 순으로 되어 있었으나, 대문간은 앞쪽을 토벽으로 막고 고방은 앞쪽을 개방하여 마루로 개조하였다. 사당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쌓고 원형으로 다듬은 주초를 놓아서 원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겹처마로 양측 면의 박공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체화당은 이전의 셋째 아들 신규가 1632년(인조 10)에 지었으며, 이전이 살던 집이다. 건물로는 창덕사당과 이전을 모시는 월간사당 등이 있다. 여기서 체화는 형제가 우애롭게 지낸 것을 상징한다. 이전은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동생 이준이 백화산전투에서 병으로 죽어가고 있을 때 죽음을 무릅쓴 채 동생을 업고 전장을 빠져나와 생명을 건지게 했으며 이들 형제간의 우애를 그림으로 그린 형제급난도가 전해진다.

경주향교

경주향교

2026-03-13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27-20 (교동)

경주향교는 경주교촌한옥마을과 경주최부자댁 인근에 자리하고 있다. 이 일대가 교촌, 교리, 교동이라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향교 때문이다. 이 자리에 신라 최고의 중앙교육기관인 국학이 신문왕 2년(682)에 처음 세워졌다. 고려시대에는 성종 6년(987)에 지방교육기관인 학원을 설치하고 11년(992)에 시설을 정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향교로 이어져 성종 23년(1492)에 문묘와 성균관의 배치형식을 따라 다시 지었다. 현재와 같은 건물배치는 향교의 표본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선조 33년(1600)에 대성전을 비롯해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을 다시 지었고 광해군 6년(1614)에 명륜당 등과 같은 학문을 닦는 강학공간을 고쳐지었다. 광복 후에는 학교의 임시 교사로 활용되었으며 1999년부터는 사회교육원이 개설되어 강학의 맥을 이어오고 있다. 향교 앞쪽의 대성전과 동무·서무는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리는 제향공간이다. 뒤쪽에는 강학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이 거처하며 공부하던 동재·서재가 있다. 교생의 정원은 90인이었으며 경서와 시문을 위주로 가르쳤다. 영남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로 서울 문묘와 같이 다수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광주지산동오층석탑

광주지산동오층석탑

2026-03-13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광주 시내에 상당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2기의 탑 가운데 동쪽에 위치한 것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이 서있는 부근은 백주사[栢州寺]터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추정할 만한 자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1955년 해체, 수리할 때 4층 지붕돌 윗면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었고 1961년에 다시 수리를 하여 일부 석재를 보완하였다. 광주 전남지방에 남아있는 몇 안 되는 5층석탑 가운데서도 우수한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이다. 탑은 부처의 유골을 모신 조형물로, 실제 유골이 없더라도 상징적으로 모셨다고 여겨진다. 광주 지산동 오층 석탑은 통일 신라 후기 석탑으로 과거에는 광주의 동쪽에 있는 탑이라서 ‘광주 동오층 석탑’으로도 불렸다. 2층 바닥돌(기단부) 위에 몸돌부(탑신부)를 5층으로 쌓고, 그 위에는 머리 장식(상륜부)을 올렸다. 탑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바닥돌은 여러 개의 돌로 되어 있고, 몸돌부와 지붕돌은 모두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1층 지붕돌받침만 다섯 단이고, 2층부터는 각 단이 네 단으로 되어 있어서 통일 신라 시대 후기 양식을 따랐음을 알 수 있다.

용계서원

2024-05-23

경상북도 영천시 자양면 원각길 49-6

용계서원은 원각마을 초입부에 있는 서원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이맹전의 학덕과 충의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맹전이 죽은 후인 1782년 왕명으로 토곡동에 건립되어 이맹전은 비롯한 생육신을 배향하였다.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노항동으로 옮겨 서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76년에 영천댐 건설 공사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용계서원은 3칸 대문채를 통하여 들어가면 강당이 있고 그 뒤에 사주문을 통하여 사당으로 출입하도록 하고 사방으로 낮은 담장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이익공계 형식의 5량 가로 건축된 누각식의 팔작집이다. 사당은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경주 내물왕릉

2025-12-15

경상북도 경주시 포석로 1065 (황남동)

경주향교 인근 인왕동 고분군에 있는 내물왕릉은 신라 제17대 내물왕(재위 356~402)의 무덤으로 401년에 조성되었다. 밑지름 22m, 높이 5.3m의 봉토분으로 밑면 주변에는 자연석의 한 모서리가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무열왕릉처럼 그 안에 별도의 호석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에 첨성대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 위치와 일치한다. 1969년 8월 27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내물왕은 김 씨 왕으로는 두 번째로 왕위에 올랐으며 이후 김씨 성에 의한 독점적 왕위 계승을 이루었다. 마립간이란 왕 명칭을 처음 사용하였고, 중국 전진과의 외교관계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입하였다. 백제와 왜의 연합 세력이 침입하자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국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