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화양서원 묘정비

화양서원 묘정비

2025-11-21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화양서원 묘정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제향하는 화양서원에 세워진 비석이다.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 취지와 서원에서 제향하는 인물, 서원의 주인에 대해 기록해 놓은 것이다. 비는 높이 210cm, 폭 75cm, 두께 30cm로 넓이 150cm의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숙종 42년(1716)에 세웠으며 비문은 윤봉구가 짓고, 전자는 옥편체에서 집자하고, 비문은 안진경체에서 집자한 것이다.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었다가 광복 후에 다시 세워놓게 되었다. 손꼽히는 경승지인 화양계곡 내에 있는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에 문정공 좌의정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서원이다. 창건되던 해에 사액을 받고 숙종 42년(1716) 어필로 편액을 달았다. 창건된 해에 편액을 받았으며 숙종 42년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다. 그러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었으며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리었다. 1999년 화양서원이 송시열 유적으로 국가유산이 된 이후 2004년 송자사 · 승삼문 2동을 복원하였다.

하담 김시양 신도비

하담 김시양 신도비

2025-11-21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로 182

조선 인조 때의 명신인 김시양선생의 신도비로 1670년(현종 11년) 8월에 세워졌다. 김시양은(1581~1643)은 조선의 문신으로 1605년(선조 38)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1년 광해군 시절 전라도도사로 향시를 주관할 때 왕의 실정을 비유한 시제를 출제하였다 하여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1623)으로 풀려나와 여러 관직을 지냈다. 1624년 이괄의 난 때 도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고, 이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인조 9년(1631년)에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도원수 ·사도체찰사를 겸임하고,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 신도비는 김시양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후대에서 세운 비석이다. 비석의 비문은 당대의 명문장가인 조경이 김시양의 아들인 김휘의 요청으로 지었으며, 글씨와 전자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인 이정영이 썼다. 방형대석과 비신, 가첨석을 갖춘 전형적인 신도비로 최근에 난간석을 돌려 보호하고 있다. 모두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나 암질이 차이가 있다. 현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500m 앞의 취묵당 옆도로(충민사 부근)에 세워졌던 것을 도로폐쇄로 1976년 이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이전 과정에서 귀부나 방형으로 조성되어 있었을 대석의 원형이 망실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비록 대석은 변형되었으나 가첨석과 비신은 화강암으로 3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전형적인 조선의 신도비 양식을 갖추고 있으며 문장과 서체가 뛰어나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취묵당

취묵당

2026-03-13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충민사길 45

1662년(현종 3년)에 백곡 김득신이 만년에 세운 독서재로 괴강가에 자리하고 있는 정자이다.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안쪽에 마루를 깔고 난간이 둘려있다.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괴강의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더불어 정자건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김득신은 자는 자공, 호는 백곡·구석산인이며 임진왜란 당시 진주대첩 승리의 공을 세운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의 손자이기도 하다. 영감과 직관을 통해 자연의 생명을 조화롭게 읊은 시가 으뜸이라고 칭해진다. 5언·7언 절구를 잘 지었으며 시어와 시구를 다듬는 것을 중요시했다. 김득신이 이곳에서 『사기』와 『백이전』을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고 하여 일명 억만재로도 불린다. 취묵당은 김시민 장군의 사당인 충민사와 가까이 자리하고 있고 벽초 홍명희 생가, 제월대 등의 명승지가 많이 있다

청덕사

청덕사

2025-03-19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한불로청덕2길 15-1

청덕사는 조선 순조 31년(1831)에 태조 이성계의 첫째 아들인 진안대군 이방우와 대군의 장자인 봉령후 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건립되었다. 이방우는 고려 공양왕 초에 밀직부사로 부친이 혁명의 뜻이 있음을 알고 함흥에 은거하다가 죽었다. 후에 진안대군에 추봉 되었으며, 해주의 지청사에 배향되었다. 청덕사로 현판을 붙인 것은 대군이 청빈하고 덕이 있다고 하여 ‘청덕’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청덕사’란 편액이 걸려있다. 내·외삼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으며, 외정에 연못을 조성하였다. 외정 안에 1933년 후손 이태호가 인도교를 창립하고, 이를 기념하여 교리를 적어 세운 인도교창립기념비가 있었는데, 일제 때 일인들이 이곳을 참배했다고 하여 광복 후 주민들에 의해 일부가 파손되었던 것을 2011년 철거하였다.

괴산 정인지 묘소

괴산 정인지 묘소

2025-03-19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외령로1길 24

괴산 정인지 묘소는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며 정치가였던 학역재(學易齋) 정인지(1396∼1478)의 묘소이다. 태종 14년(1414)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고려사>, <용비어천가>, <태조실록> 등 각종 편찬 사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세종 때에는 집현전 학사로 집현전 직제학, 부제학 등을 지내면서 성삼문, 신숙주, 최항과 함께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는데 공을 세웠다. 단종 1년(1453) 계유정란 때 세조를 도와 공을 세워 1등 공신이 되고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단종∼성종 연간에는 학덕을 갖춘 정치가로서 민심을 진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저서로는 <역재집> 있다. 묘 앞에는 묘비 1기가 서 있는데 대리석으로 만든 갓이 없는 높이 250cm, 90cm의 크기이다. 비문은 강희맹이 지었다고 전한다. 묘비 앞으로는 상석과 장명등이 서있고, 좌우로 문관석과 망주석이 서 있다. 묘소 아래에 서거정이 지은 신도비가 있었는데 유실되어 1958년 서거정이 지은 비문을 윤보선이 쓰고 성락서가 제전을 써서 다시 세웠다.

장암 정호 묘소

장암 정호 묘소

2025-03-19

충청북도 괴산군 불정면 지장리

괴산 정인지 묘소는 문경공(文敬公) 장암(丈巖) 정호(鄭澔,1648-1736)의 묘소이다. 정호는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로 자는 중순(仲淳), 호는 장암(丈巖), 본관은 연일(延日), 좌의정 정철(鄭澈)의 후손이다.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 8년(1682) 생원이 되고 1684년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검열(檢閱)·정언(正言)을 지냈으나 1689년에 을사환국(乙巳換局)으로 파직되어 문외출송(門外黜送)당했다가 이어서 경성(鏡城)에 유배되었다. 이후 숙종 20년(1694)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이 기용될 때 재등용되었고 당쟁의 와중에 부침을 거듭하였으나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충주의 누암서원(樓巖書院)에 배향되었고, 부조묘(不轅廟)는 충주시 가금면 창동에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 묘비, 망주석(望柱石) 등이 있으나 전체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위정사

위정사

2025-03-21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충민로광진8길 53-1

위정사는 숙종 8년(1667)에 위정공(威靖公) 김정경(金定卿)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 하기 위하여 건립된 사당으로 매년 음력 7월 15일, 10월 29일에 향사하고 있다. 김정경(1345-1419)은 조선 태종 때의 장군으로 본관은 안산(安山), 진주목사(晋州牧使) 성경(星慶)의 아들이다. 태조(太祖)에서 태종까지 섬겼으며, 삼군절도사(三軍節度使), 이조전서(吏曹典書·판서) 등을 역임했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간 일도 있었다. 정종 2년(1400) 제2차 왕자의 난(芳幹의 난·朴苞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좌명공신 4등에 책록되고 연성군에 봉해졌다. 이 사당은 앞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 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威靖祠’란 편액을 걸었으며,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다. 대문밖 마당에는 1980년에 세운 김정경신도비(金定卿神道碑)가 있다.

연풍향청

연풍향청

2025-12-30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중앙로 44

괴산군 연풍면 소재지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축물이다. 향청은 본래 조선 초기 지방관의 행정을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유향소였으나, 성종 20년(1489)에 향청이란 이름으로 개칭하고 지방관의 감독 하에 운영되었던 자문기관이다. 향촌의 풍기를 단속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마을의 관리임원을 추천하고, 조세나 요역의 부과 또는 분배 등에 대한 자문기능을 담당하였다. 향청의 수장을 좌수 또는 좌장이라 하고 그 아래에 좌별감, 우별감, 창감, 방감 등을 두었다. 연풍향청은 1910년 경술국치 후에는 천안헌병대충주관구연풍분견소, 괴산경찰서연풍주재소, 괴산경찰서연풍지서 등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1963년 3월부터는 천주교 연풍공소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은 1995년 보수 전까지 정면 5칸 측면 2칸의 통칸으로 된 팔작지붕 초익공식의 목조기와집이었으나 1995년 보수 시 부식된 기둥을 교체하고 창호, 초석 등을 수리하였으며, 고증에 따라 온돌방 2개소를 원형에 가깝게 보수하고 홑처마를 겹처마로 바꾸었다. 천주교 성지인 연풍성지와 함께 자리하고 있으며 근처 연풍향교와 연풍동헌 등 역사의 흔적이 담긴 건축물이 많이 있다.

석보군묘각

석보군묘각

2025-03-21

충청북도 괴산군 청안면 조천상길 74-21

괴산군 청안면에 있는 전주 이씨 석보군파의 사묘재실로 조선 정종의 9남인 석보군 이복생과 부인 원주 김씨, 석보군 장남 양위의 위패를 모신 부조묘이다. 사묘는 선조의 신주나 영정을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고 재실은 무덤이나 사당 옆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지은 건물로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숙식과 제사음식 장만 등을 하는 장소를 말한다. 1905년에 초가집으로 창건하였고 1930년 기와지붕으로 재건하고 1986년에 중수하였다. 건물은 홍살문, 삼문, 부조묘로 구성되어 있으며 부조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겹처마 맞배지붕 집이다. 평면구성은 전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내부는 통칸으로 하여 우물마루를 설치하였다. 기단은 장대기단으로 정평주초를 설치하고 전면은 원기둥, 후면은 각주로 하였다. 공포 형식은 이익공으로 하였으며 가구 형식은 1고주 5량가로 하였다. 부조묘의 단청은 모로 단청으로 하였으며 좌향은 서북향이다. 중수 시 부조묘 측면의 중방하 및 묘각 후면의 하방하에 설치된 현대식 붉은 벽돌을 철거하고 전통기법으로 재현하였다. 또한 장마루는 철거하고 한식 우물마루로 하였다. 보의 치목기법에서 고식을 남기고 있으며, 벽체 및 마루에서는 원형에 가깝게 재복원되었다. 1996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고 전주 이씨 석보군파에서 관리하고 있다.

채운암 대웅전

2024-05-02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2길 30

채운암은 고려 충렬왕 3년(1277) 도일선사가 세운 암자로 수도암이라 하였고 원래 현재의 위치에서 화양천을 건너 마주 보이는 첨성대 안쪽계곡에 있었다. 현 위치에는 효종 4년(1655) 혜일선사가 환장사를 창건하였다. 구한말 왜병의 침입으로 대웅전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1948년 대홍수로 채운암이 파괴되었다. 1949년에 남아있는 요사채의 일부를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채운암이라 부르고 있다. 채운암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로 1980년을 전후하여 창호, 단청 등을 보수하였으며 충청북도 문화재자료로 2000년 5월에 지정되었다. 사찰에 전하는 상량문에 의하면 순조 26년(1826)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채운암 대웅전에는 충청북도 유형문화재인 목조여래좌상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 불상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하고, 왼손은 무릎 위에 올려 설법하는 모양을 하고 있다. 불상의 제작 연대를 밝혀주는 유물이 불상 속에서 발견되었고 조선 경종 3년(1723)에 만들었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 후기 불상 연구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