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3-11
경기도 김포시 월곶면 성동리
김포 문수산성은 갑곶진과 함께 강화의 입구를 지키던 조선시대의 성으로, 병인양요의 격전지였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자 프랑스군이 내륙으로 침투하는 것을 미리 차단하기 위해 한성근을 순무 초관에 임명하고 문수산성의 수비를 강화하였다. 같은 해 10월 프랑스군이 70여 명이 바다를 건너오자 문수산성에 있던 조선군은 프랑스군 3명을 사살하고 2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하지만 무기의 열세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문수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조선군이 퇴각하자 프랑스군은 문수산성의 남문과 성벽을 파괴하고 민가 30여 호를 불사른 뒤 강화로 다시 돌아갔다. 조선군은 결과적으로 이 전투에서 패전했지만 프랑스 군대에 처음으로 일정한 타격을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김포 문수산성은 1694년에 돌을 이용해 쌓은 석축산성으로 1812년에 고쳐 쌓았다. 잘 다듬어진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그 위에 몸을 숨기기 위한 방어시설인 여장을 둘렀다. 당시의 성문은 취예류·공해루 등 3개의 문루와 비밀통로인 암문 3개가 있었다. 이 중 취예루는 갑곶진과 마주 보는 해안에 있었으며, 육지로 나오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현재 해안 쪽의 성벽과 문루는 없어지고 마을이 되었으며 산등성이를 연결한 성벽만 남아있다.
2026-05-07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
대동법시행기념비는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조선시대에 세금으로 납부하던 지방특산물 대신 쌀을 납부하는 제도로,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100여 년에 걸쳐 확대 실시되었다. 효종 2년(1651)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 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습으로, 각 부분의 조각은 형식에 그친 감이 있다. 비의 원래 명칭은 ‘김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金堉大同均役萬世不亡碑]’또는 ‘호서선혜비[湖西宣惠碑]’이다. 비문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내던 이민구가 짓고, 의정부 우참찬 오준이 글씨를 썼다. 효종 10년(1659)에 세운 비로, 원래는 이곳에서 5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었으나 1970년대에 옮겨 놓았다.
2025-07-07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천진암로 1203
천진암성지는 우리나라 천주교 창립 선조들의(이벽, 정약종,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유해를 모신 한국천주교의 발상지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장소이다. 성지에는 성모마리아 상, 천진암 대성당 터, 성모 성당 등 둘러볼 곳이 많이 있다. 36만여 평 성역에 3만여 평의 대성당 건립 터에서는 매년 수 만 명의 신도들이 모여 한국 천주교회 창립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2025-03-18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숭의전로 382-27
숭의전지[崇義殿址]는 조선시대에 전조[前朝]인 고려시대의 왕들과 공신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받들게 했던 숭의전이 있던 자리이다. 이곳은 원래 고려 태조 왕 건[王 建]의 원찰이었던 앙암사[仰巖寺]가 있었던 곳으로 1397년에는 고려 태조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을 건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숭의전의 시초이다. 사당 건립 이후 1399년(정종 1년)에는 왕명에 의해 고려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惠宗], 성종[成宗],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충경왕 元宗], 충렬왕[忠烈王], 공민왕[恭愍王] 등 고려 8왕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현재 재건된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숭의전을 비롯하여 배신청, 이안청, 전사청 등 5동의 부속건물과 내신문, 외신문, 협문 3동, 운조문 등 6개의 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2026-03-09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현등사길 34
현등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로, 1772년 쓰인 운악산 현등사 사적이란 책에 신라 23대 법흥왕 때 인도 승려 마라가미가 들어오자 그를 위해 운악산에 절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고 통일신라 말 도선국사가 다시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고려 희종 6년(1210) 보조국사 지눌이 등불이 거듭 보이는 꿈을 꾸어 운악산을 방문하니 건물 앞에 옥으로 만든 등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에 절을 다시 크게 지은 뒤 현등사라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종 11년(1411) 함허대사 기화가 절을 다시 고쳐 지은 후 왕실에서 기도를 드리는 사찰로 위치하게 되었다. 영조 39년(1763)에는 화재를 입어 많은 건물이 없어졌고 이듬해 다시 지었으며 계속해서 조금씩 수리를 하다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에 탄 이후 지금과 같은 모습을 지니게 되었다. 운악산 등산로 입구에 일주문이 있으며 사찰 안에는 불이문, 극락전, 보광전, 지장전, 삼성각, 영산보전, 만월보전, 적멸보궁 등의 주요 건물들이 있다. 현등사에는 보물 현등사 동종을 비롯하여 석탑 2기, 승탑 1기, 불상 2점, 불화 7점 등 경기도 유형문화유산 12점을 소장하고 있다.
2026-03-04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로 399-18
칠현산 기슭에 있는 칠장사는 신라 선덕여왕 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되었다는 설이 있는 사찰로 고려 시대 1014년 혜소국사가 왕명으로 중창하였다. 칠장사와 칠현산이란 이름은 혜소국사가 이곳에 머물면서 일곱 명의 악인을 교화하여 현인으로 만들었다는 설화에서 유래되었다. 깊은 차령산맥이 그 줄기를 품고 있어 1383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충주 개천사에 있던 고려조의 역대 실록을 칠장사로 옮겨 8년간 소장해 소실을 면한 일도 있었다. 1389년에 왜구의 침입으로 전소되어 폐허로 내려오다가 1506년에 흥정이 중건했다고 한다. 이후 1623년에 인목대비가 아버지 김제남과 아들 영창대군의 원찰로 삼아 사세를 크게 중창했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대웅전과 국보 제296호 오불회괘불탱을 비롯하여 혜소 국사비, 철당간 등 지정문화재가 많다. 또한 칠장사에는 여러 구전이 내려오는데 궁예가 10세까지 활쏘기를 하며 유년기를 보냈다는 활터가 남아있으며 의적 임꺽정이 갖바치 스님 병해대사에게 바친 꺽정불 이야기가 있다. 또한 암행어사 박문수가 과거시험을 보기 전에 나한전에서 기도를 드리고 잠이 들었는데, 꿈에 나타난 나한님이 과거시험 구절을 가르쳐 주어 장원급제했다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어 시험 합격을 비는 사람들의 발길이 많은 곳이다.
2026-04-15
경기도 안성시 서운면 청룡길 140
청룡사는 1265년 서운산 기슭에 명본 국사가 창건한 절로서 창건 당시에는 대장암이라 하였으나 1364년 나옹화상이 크게 중창하고 청룡사로 고쳐 불렀다. 청룡사라는 이름은 나옹화상이 불도를 일으킬 절터를 찾아다니다가 이곳에서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청룡을 보았다고 하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절 안에는 대웅전, 관음전, 관음 청향각, 명부전 등이 있고 대웅전 앞에는 명본 국사가 세웠다는 삼층 석탑 등이 보존되어 있다. 대웅전은 다포계의 팔작집으로 고려 말 공민왕 때에 크게 중창하여 고려 시대 건축의 원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다. 법당 안에는 1674년에 만든 5톤 청동 종이 있고 큰 괘불이 있어 대웅전 앞에 괘불을 걸 돌지주(기둥)까지 마련해 놓았다. 이 지주는 구불구불한 아름드리나무를 껍질만 벗긴 채 본래의 나뭇결 그대로 살려 기둥으로 세웠다. 청룡사 주변에는 서운산, 칠장산, 미리내 성지, 죽주산성 등의 관광지가 있다.
2024-08-27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길 50
1,306㎡ (395평) 규모의 제암리 3.1운동 순국기념관은 제암리 학살사건을 기리기 위한 기념관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은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주요인사 명단을 입수한 일본 헌병 30여명이 4월15일 오후 2시경 제암교회에 주민들을 모이게 한 뒤 모든 문을 폐쇄하여 감금시키고 교회에 불을 지른 후, 교회를 향하여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23명을 학살하고 30여채의 가옥을 불태워버린 사건이다. 제암리 학살사건이 있은 지 63년이 지나서야 마을에서 4km 떨어진 도이리 공동묘지에 평토장으로 안장되었던 유해를 발굴하여 제암교회 뒷동산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마련하였으며 후세에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한 기념비와 전시관, 교육관 조형물 등을 설치하여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영상실에서는 제암리 사건 및 배경, 화성독립운동에 대한 동영상을 상영하고, 제1전시실에서는 1919년 화성지역에서 전개된 3.1운동의 배경과 전개과정 그리고 4월15일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 학살, 유가족들의 증언, 그 후의 기록들을 사진패널과 유물, 인터뷰 영상 등을 전시하고 있다. 제2전시실은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 개관 20주년을 맞아하여 제암리 학살사건을 기억하고 순국선열의 독립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유족과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제암리 이야기가 1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우리의 이야기가 되는 과정을 자료와 영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기념관에서는 사전예약을 하면 전문적 해설 소양을 갖춘 해설사가 제암·고주리학살 사건과 화성독립운동에 대한 해설을 제공한다.
2025-03-18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상원사길 292
상원사는 용문사에서 서쪽으로 3.5㎞ 떨어져 있다. 유물로 미루어보아 고려 시대 창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상원암이라고도 한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에 속해 있다. 창건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물로 미루어 보아 고려 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1330년대에 보우가 이 절에 머물며 수행했고, 1398년에 조안이 중창했으며, 무학대사가 왕사를 그만둔 뒤 잠시 머물렀다. 1458년 해인사의 대장경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1462년에는 세조가 이곳에 들러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어명을 내려 크게 중수했다고 하는데, 최항이 그때의 모습을 기록한 관음 현상기가 지금도 전해지고 있다. 1463년에는 왕이 직접 거동하였으며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원찰(願刹)이 되었다. 그 후 끊임없이 중수되어 왔으나 1907년 의병 봉기 때 일본군이 불을 질러 겨우 법당만 남게 되었다. 1918년 화송(華松)이 큰 방을 복원하고 1934년에는 경언(璟彦)이 객실을 신축했으나 6·25전쟁 때 용문산 전투를 겪으면서 다시 불에 타 없어졌다. 1969년에 덕송(德松)이 복원에 착수했으며 용문사의 암자에서 독립시켰다. 1970년 경한니(鏡漢尼)가 요사(寮舍)를 복원하고 1972년에는 삼성각을, 1975년에는 대웅전을 각각 복원했으며 1977년에는 용화전과 청학당을 지었다. 용문산은 경기도에서 화악산, 명지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으로 기암괴석과 고산준령을 고루 갖추고 있는 산이다. 본디 미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조선을 개국하고 이태조가 등극하면서 '용문산'이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2026-03-05
경기도 양평군 용문면 용문산로 782
용문산관광단지에 있는 용문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양평군 용문면의 용문산 자락에 있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 2년(913) 대경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일설에는 경순왕(927~935 재위)이 친히 행차하여 창사 하였다고도 한다. 고려 우왕 4년(1378) 지천대사가 개풍 경천사의 대장경을 옮겨 봉안하였고 조선 태조 4년(1395) 조안화상이 중창하였다. 용문사에는 대웅전, 산령각, 칠성각, 요사채, 일주문, 템플스테이 수련관, 다원 등이 있다. 용문사에는 나이는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는 높이 42m, 뿌리 부분 둘레 15.2m인 동양에서 가장 큰 은행나무가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용문사에서부터 계곡을 따라 2km 올라가면 산중턱에 용의 뿔을 닮은 용각바위를 만나게 되고 여기서 1km 더 올라가면 100명가량 앉아 쉴 수 있는 대형바위, 마당바위가 있다. 템플스테이도 운영을 하고 있으며 휴식형 프로그램과 체험형 프로그램 중 원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