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9-16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신북읍 유포리
소양호는 강원도 춘천시 신북읍에 위치한 인공호수로, 1973년 10월 소양강을 막아 만든 동양 최대의 사력댐인 소양강댐에 의해 조성되었다. 면적은 1,608ha, 저수량은 약 29억 톤에 달하며, 수면 직선거리는 60km, 굴곡을 따라 측정한 수면 거리는 120km로 한국 최대 규모를 자랑해 ‘내륙의 바다’라 불린다. 소양강댐 주변에는 산책로와 둘레길이 조성되어 있으며, 정상에서 팔각정까지 이어지는 왕복 2.5km 코스에서는 소양호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소양강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면 고려시대 사찰인 청평사를 방문할 수 있으며, 맑은 호수 위를 유유히 떠다니는 풍경은 큰 감동을 준다. 댐 정상에는 식당, 커피숍, 물문화관, 휴게소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마련되어 있으며, 물문화관은 무료로 개방되어 있어 함께 둘러보기에 좋다.
2025-07-14
강원특별자치도 화천군 간동면 배터길 36-8
파로호는 화천댐이 만들어지면서 생겨난 인공 호수로 1944년 화천댐을 완공하면서 생겼다. 파로호는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상상 속의 봉황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대붕의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대붕호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광복 이후에는 북한에 속했던 지역이였으나 한국전쟁 때 되찾아 이를 치하하기 위해 이승만 전 대통령이 화천을 직접 방문해 깨트릴 파자와 오랑캐의 노자를 써서 파로호라고 이름을 지었다.
2026-03-09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운정길 63
강릉 선교장은 강원도 지역에서 가장 잘 남아 있는 품위 있는 사대부 가옥이다. 강릉시에 경포 쪽으로 4km쯤 떨어진 선교장은 조선시대 상류층의 가옥을 대표하는 곳으로, 국가민속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경포호가 지금보다 넓었을 때, 배 타고 건넌다라고 하여 이 동네를 배다리 마을(船橋里)이라 불렀는데, 선교장이란 이름은 바로 여기서 유래한다. 선교장은 조선 영조 때(1703년) 효령대군의 후손인 이내번이 족제비 떼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한 명당자리에 집을 지은 후, 그 후손이 지금도 살고 있다. 긴 행랑에 둘러싸인 안채, 사랑채, 동별당, 가묘 등이 정연하게 남아있고, 문밖에는 수백 평의 연못 위에 세워진 활래정이라는 정자가 있어, 정원까지 갖춘 구조를 보여 준다. 선교장은 건물뿐 아니라 조선 후기의 주거생활과 생활용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26-05-27
강원 삼척시 성내동 9-3
오십천 절벽 위에 자리한 삼척 죽서루는 누각이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사 김효손이 옛 터에 중창하였으며, 이후 수십 차례에 걸쳐 중수되거나 단청되었고, 일부는 증축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죽서루는 하층이 17개의 기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가운데 9개는 자연석 위에 세워졌고, 나머지 8개는 석초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건축사적 특징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지닌다. 상층에는 20개의 기둥이 있으며, 지붕은 전통적인 팔작지붕 형식이다.
2025-12-02
강원특별자치도 속초시 설악산로 1085-3 (설악동)
강원도 속초시 설악동에 있는 고려 시대의 산성으로 둘레길이 약 3,500m로 일명 설악산성이라고도 한다. 이곳에 오르면 외설악의 절경과 동해의 끝없는 바다가 펼쳐진 장관을 감상할 수 있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졌으며 터만 남아 있다. 이 산성은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에서 북쪽으로 뻗은 화채능선 정상부와 북쪽 산 끝을 에워싸고 있는 천연의 암벽 요새지이다. 산성을 만든 연대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알기 어렵지만 신라시대에 권 씨와 김 씨 두 장사가 난을 피하기 위해 쌓았다 하여 권금성이라고 한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낙산사기에는 고려 말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인근 주민들이 이곳에 성을 쌓고 피란했다고 설명하고 있음에서 고려 말기 이전부터 존속해오던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산성의 대부분은 자연암벽을 이용하고 일부는 할석으로 쌓았는데, 좌우로 작은 계곡을 이루며 물이 흐르는 곳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 오르내리기 힘들어 조선 시대 이후로는 차츰 퇴락하여 흔적만 남아 있다.
2025-07-25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향교길 34
1398년 현유의 위패를 봉안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1407년 옥서동 월계곡으로 이전하였다가 1468년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된 대성전, 정면 7칸, 측면 1칸의 명륜당을 비롯하여 동재, 서재, 동무, 서무, 숙청재, 장경실, 신삼문, 직청, 동서협문, 제기고 등이 있으며 향교 밖에는 홍살문과 비군이 있다. 대성전에는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시대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이 교생을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신학제 실시에 따라 교육적 기능은 없어졌다. 봄·가을에 석전을 봉행하며 초하루·보름에 분향을 하고 있다. 이 향교는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0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현재 전교 1명과 장의 두 명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교육 인문학강의, 유교아카데미 강좌, 민화교실 체험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다.
2026-06-19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토성면 동해대로 5110
청간정은 조선시대의 정자로 기암절벽 위에 팔작지붕의 중층누정으로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처음 지은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20년(중종 15)에 군수 최청이 고쳐 세웠다는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때 불타 없어졌다가 1928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정자의 규모는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이다. 추녀 밑에 걸린 청간정(淸澗亭) 현판은 1953년 故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것이다. 청간정의 아름다운 주위 풍광은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혀 예부터 시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며 노송 숲 사이로 뚫린 오솔길을 지나 탁 트인 동해를 굽어보는 정취가 그윽하다.
2025-03-13
강원특별자치도 양양군 강현면 낙산사로 100
강원도 양양 낙산사에서 홍련암의 관음굴로 가는 바닷가 절벽 위에 자리한 정자다. 의상대의 ‘대’란 주변 경치를 감상하기 위해 지은 집을 말한다.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와 해안 절경이 빼어나 양양 8경에 이름을 올렸고, 낙산사에서 반드시 들려야 할 곳으로 손꼽힌다.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서 소개한 관동팔경(강원도 영동의 여덟 군데 명승지) 중 하나로, 동해안 일출이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양양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이라는 이름으로 명승에 지정되어 있다. 낙산사 의상대는 의상대사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25년에 지은 정자다. 의상대사는 신라 문무왕 11년(671)에 낙산사를 창건한 고승으로, 절 곳곳에 그와 관련한 전설이 전해진다.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온 의상대사가 낙산사를 지을 때 지금 의상대가 있는 자리에서 산세를 살피고 좌선 수행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현재의 의상대는 1995년에 육각정으로 복원된 모습이다.
2026-06-02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
장릉은 조선 6대 단종(재위 1452~1455)의 능이다. 단종이 1457년(세조 3) 노산군(魯山君)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영월호장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현재의 자리에 가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묘를 찾아 봉분을 만들었고, 1580년(선조 13)에 석물을 세운 후 제사를 지냈다. 1698년(숙종 24) 단종으로 왕의 신분이 회복되어 능의 이름을 장릉이라 하고,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장릉은 일반적인 조선왕릉과 다르게 단종의 충신들을 위한 건조물이 있다. 장릉 입구에는 노산군묘을 찾아 제사를 올린 영월군수 박충원(朴忠元)의 뜻을 기린 낙촌비각(駱村碑閣), 재실 옆에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묘를 만든 엄흥도의 정려각(旌閭閣),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종친, 충신, 환관, 궁녀, 노비 등 268명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藏版屋)과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는 배식단(配食壇)이 있다.
2025-07-28
강원특별자치도 동해시 공단12로 77 (구호동)
동해 시청에서 동쪽으로 1㎞쯤 떨어진 동해안에 있는 만경대는 삼척 김 씨 김훈이 만든 정자이며, 그동안 풍파로 폐허가 된 것을 60년 전에 삼척 김 씨들이 다시 세웠다. 정자에 올라 동쪽을 바라보면 망망대해가 파도치는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 공의 자는 원충, 호는 신당이며 신당 공 훈은 성품이 영매하여 청렴하고 곧은 지조로 관리로 일하다가 1613년(광해군 5년)에 향리에 돌아와 동 회리(신당촌)에 살면서 만경대를 창건하고 풍광을 즐기면서 갈매기를 벗 삼아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동쪽은 끝없는 동해바다이고 북쪽은 긴 해변 푸른 소나무가 10리가량 펼쳐지며 서쪽으로는 장엄한 두타산 경관이 뒤뜰과 함께 눈앞에 펼쳐지고 높은 벼랑 아래 전천강이 유유히 동해로 흐르니, 만경대는 삼척의 죽서루와 쌍벽을 이루어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660년(현종 원년)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1595~1682)이 주변 경관에 감탄하여 만경이라 하였는데 그 후부터 만경대라 불렀다 한다. 1786년(정조 20) 부사 유한 전이 시를 읊어 현판으로 남겼고 1872년(고종 9) 중수하였을 때 공조판서 김원식이 상량문을 짓고 한성부윤 이남식이 해상 명구라는 현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