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우산성

우산성

2025-06-11

충청남도 청양군 청양읍 백천리

우산성은 충청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백제시대 축성한 산성이다. 대개 가로모양의 자연석을 모쌓기로 하였으며, 잘 남아 있는 곳의 성벽은 높이 7m, 폭 6m가량 된다. 남벽과 동벽이 만나는 곳, 북벽과 동벽이 만나는 부분은 다른 곳보다 높은데 아마도 전투 시 장수가 올라서 지휘하던 장대가 있던 곳으로 보인다. 성 안에서는 몇 개의 건물터와 저장용 구덩이가 확인되었으며,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우물이 있다고 한다. 성에서 보이는 유물은 백제 토기조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기와조각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이 성은 백제 때 쌓아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산성을 따라 우산의 정상에 이르다 보면 칼바위 광장을 만나는데 보기 드문 기이한 모습의 바위들을 볼 수 있다. 정상에 위치한 청룡정 누각에 걸터앉아 청양의 전경을 내려다보면 산행 끝에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서천 성북리 오층석탑

2026-06-08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성북리

성북리 오층석탑은 높이 6.2m로 고려시대에 세워졌으면서도 백제 영토였던 서천 지역의 특색을 살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닮은 백제계 양식을 취하고 있다. 이처럼 이 탑은 단층 기단에 5층의 탑신을 갖추는 등 백제계 석탑 양식을 가장 충실히 따르고 있다. 특히 각 면의 모습이 위는 좁고 아래는 넓어 사다리꼴을 하고 있는 것이 영락없는 백제의 탑이다. 그러므로 백제계 석탑 양식의 분포에 따른 그 전파 경로를 알아내는 데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가치가 있는 국가유산이다. 1963년에는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곳은 주변에 비인읍성, 비인향교, 비인해수욕장, 월명산 등이 있어 연계하여 관광하기 좋다.

월남 이상재선생 생가

월남 이상재선생 생가

2026-04-15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종단길 71

조선 후기 사회 운동가인 이상재(1850∼1927) 선생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이상재는 종교가·정치가로 일찍이 기독교에 입교하여 신앙운동을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자 노력했다. 고종 18년(1881)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돌아와 고종 25년(1888) 전권대신 박정양을 수행하여 주미공사 서기로 부임했다. 미국에 다녀온 뒤, 신문명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광무 2년(1898) 서재필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27년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단일 전선을 결성하여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저서로 논문집 『청년이여』, 『청년위국가지기초』 등이 있다. 선생의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초가집으로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었다고 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한 것이다. 생가 옆에는 유물전시관이 있어 선생이 생전에 남긴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금이성

금이성

2026-03-05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송성리

금이성은 금성산 정상에 축조된 테뫼식산성(산 정상부를 둘러쌓은 성)이다.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구축된 형태가 철옹성 같다 하여 쇠성 또는 금성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금현성이 바로 금이성을 이르는 것이다. 북으로는 전의·천안 방면, 남으로 금강 일대를 굽어보고 있으며 산성의 동북방에는 운주산성이 있고 북으로는 고려산성·증산성·전의읍내리산성·이성산성이 거의 일직선으로 보인다. 산성 아래에는 전의에서 공주로 통하는 큰 길이 통과하고 있어 이곳이 과거의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성의 축조 양식은 전형적인 백제 양식에 일부 통일신라 초기의 양식이 가미되어 있다. 남쪽 성벽이 비교적 잘 남아 있으며 성의 북단과 동남·서남단에 망루 지의 형태가 남아있고 동·북·서쪽에서 문 터가 확인된다. 성내에서 백제 시대부터 고려 시대의 유물로 보이는 항아리, 대접, 사발 등 토기 조각 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백제 시대에 축조되어 고려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

2026-03-12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유관순길 38

3·1 운동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순국한 유관순 열사의 유적으로, 생가와 봉화를 올렸던 봉화터가 있다. 유관순 열사는 대대로 내려오는 선비가문에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6년에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하였다. 다음 해에 3·1 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시위에 참가하였고, 일제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게 되었다. 이에 음력 3월 1일 아우내 장날에 시위운동을 벌여 열사의 부모를 비롯하여 19명이 죽고 30명이 부상당했으며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다. 유관순 열사는 모진 고문을 당하고 1920년 9월에 순국하였다. 시신은 서울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으나, 도시개발 과정에서 무덤을 잃어버렸다. 천안시에서는 유관순의 애국정신을 길이 추모하고 3·1 운동의 정신을 널리 알리기 위해 1972년에 사당을 세우고 열사의 영정을 모셨다. 봉화대와 봉화탑을 건립하여 매년 3월 마지막날에 봉화를 올림으로써 그날을 기념하고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아산 맹씨 행단(맹사성 고택)

아산 맹씨 행단(맹사성 고택)

2025-11-19

충청남도 아산시 배방읍 행단길 25

맹사성 고택은 설화산을 서쪽으로 등지고 배방산을 동북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수백 년간 무사히 보존되어 온 우리나라 살림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옛 모습을 간직한 집이다. 고려 말 충신이던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최영 장군의 손녀사위가 된 맹사성에게 그 집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가옥의 형태는 ‘ㄷ’자형의 맛배집으로 목재는 광솔이 되다시피 그을렸으며, 기둥과 도리 사이에는 단구로 봉설(봉황의 혀)이 장식되었고, 내실 천정은 ‘소라 반자’로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반자다. 사적으로 지정된 맹씨행단은 말 그대로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으로 맹고불의 고택, 구괴정, 쌍행수 등을 망라하여 ‘맹씨행단’ 이라 한다. 맹사성은 이 은행나무 두 그루를 손수 심고 학문에 정진하여 후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

2025-11-20

충청남도 아산시 송악면 평촌길50번길 147-20

아산 평촌리 석조약사여래입상은 아산시가지 남부 용담사 경내에 보존된 불상이다. 이 거구의 석불입상은 화강암을 다듬어 만든 고려 초기의 대표적인 장륙불상(1장 6척)으로 통일신라 양식과 고려 양식이 섞여 있다. 상체가 짧고 하체가 긴 다소 불균형적인 모습이지만 얼굴과 옷 주름의 뛰어난 조각 솜씨 덕분에 미적으로 우수하다. 특히 단아한 얼굴, 맵시 있는 이목구비, 잔잔한 미소 등은 이 시기 독특한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은 불상의 체구가 직사각형이면서 평면적이지만 손과 팔, 어깨와 다리의 형태를 능숙하게 표현한 점, 옷 주름을 묘사한 유려한 솜씨 등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또한 선이 구불거리면서도 기하학적인 좌우대칭을 잘 지키고 있다. 그리고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약합(약그릇)을 들고 있는 모습은 중생들이 앓고 있는 심신의 온갖 병마를 없애주는 자비로운 약사여래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다.

보령 충청수영성

보령 충청수영성

2026-05-15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단양 적성

단양 적성

2025-04-21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산3-1

단양적성은 충청북도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성재산 정상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산성이다. 단양적성은 석축성으로 성의 길이가 923m이지만 대부분 붕괴되었고 북동쪽 내외 부분의 안쪽 벽 높이 2~3m, 폭 1m의 석축이 일부만 남아 있다. 성재산 봉우리와 남쪽 비탈을 빙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며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 등 세 곳에서 발견되었다. 산성의 주변에는 남한강의 상류 방면과 하류 방면으로 각각 고대 교통로가 나 있으며, 동서쪽으로도 길이 트여 있다. 남한강 수로를 다라 영월과 충주 방면으로 진출이 용이하고, 강 건너 제천 방면으로 진출하기에도 유리한 교통의 요충지에 있는 산성이다. 적성에서 단양신라적성비가 발견되었는데, 이 비는 적성의 성격이나 목적, 연대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비의 건립 연대는 늦어도 551년 이전으로 보인다. 따라서 적성은 6세기 중엽 이전에 신라가 남한강 상류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초기지로 활용하고자 쌓은 중요한 전략적 가치를 지닌 성으로 평가된다. 단양적성은 삼국 시대의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신라와 고구려 세력관계 변동을 알아보는 데 큰 의미를 가진다. 또한 축성 방법이 매우 견고하게 되어 있어, 신라의 축성술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만해 한용운선생 생가지

2025-10-29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만해 한용운선생의 생가는 초가지붕을 얹었으며 방 두 칸, 부엌 한 칸으로 구성된 일자형 구조로 한용운이란 문패가 걸려있다. 댓돌이며 툇마루가 한없이 정겹고 우물과 장독대를 돌아 집 뒤 야산 언덕배기를 올려보면 적송과 조릿대가 자란다. 부엌 옆은 장작을 쌓아두는 헛간이고 사랑방 옆은 절구통과 맷돌이 보관된 헛간이다. 생가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위패와 영정을 모신 만해사라는 사당이 있다. 1879년 이곳 성곡리에서 태어난 한용운 선생은 6세부터 성곡리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워 9세에 문리를 통달,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26세에 강원도 백담사에 들어가 불문에 입도하였고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불교개혁운동에 일생을 바쳤으며 1944년 69세의 나이로 서울 성북동 심우장에서 별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