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안성죽산리석불입상

안성죽산리석불입상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봉업사지 북쪽 죽주산성 아래에 위치한 석불입상이다. 통일 신라 여래상의 전통적인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여 정제된 조각수법을 보이는 고려 전기 불상의 우수한 사례로 여겨진다. 절단되었던 머리와 신체를 접합하였으며 발은 최근에 복원하였다. 불상은 연꽃이 새겨진 둥근 대좌 위에 서 있으며, 광배는 남아 있지 않다. 민머리 위에는 육계(상투 모양의 머리묶음)가 큼직하다. 신체에 비해 약간 큰 얼굴은 둥글고 귀가 어깨까지 길게 늘어졌다. 이목구비가 비교적 작은 편이나 눈은 거의 감은 상태로 가로로 길다. 양팔을 신체에 붙인 채 오른손은 허리 부근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손끝을 아래로 하여 펼쳐 보이고 있다. 왼팔 역시 신체에 밀착한 채 가지런히 내리고 있으며, 왼손도 밑으로 내리고 있다. 양쪽 어깨에 걸쳐져 내려오는 대의는 신체 전면을 감싸고 있는데 가슴에서 촘촘한 U자형 주름을 형성하다 대퇴부에서 Y자를 형성하며 양쪽 다리로 갈라져 각기 기다란 U자형 주름을 형성하며 무릎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다. 이는 통일 신라 시대 8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유행했던 형식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안성죽산리당간지주

안성죽산리당간지주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가 서 있는 봉업사지(奉業寺址)는 여러 번에 걸친 발굴 조사 결과 신라 말기에 화차사(華次寺)로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들어와 크게 중창되면서 봉업사로 절 이름을 바꾸어 번성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현재 당간지주는 5층 석탑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 원위치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두 지주를 사각형 기둥처럼 동일하게 다듬어 세웠다. 각 면에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거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의 모서리는 경사지게 깎아 부드럽게 하였으며, 정상부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곡선을 그리도록 다듬어 다소나마 장식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다. 당간지주 안쪽 면에 별다른 흔적은 없으며, 꼭대기에 사각형으로 판 간구를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할 때 연결하는 간을 끼우도록 했다. 이처럼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거칠게 다듬어 정연하지는 못하다. 하지만 규모가 상당히 크고, 봉업사를 크게 중창할 때 함께 제작한 것으로 보여, 고려 초기에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간지주는 기단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고려 시대 들어와 세련되고 장식적인 외관보다는 안정적이고 기능에 충실한 당간지주를 건립하는 변화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

2025-12-16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6

이 한옥 민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서 한 채로 건립한 것으로 형태는 곱은 자형에 1 고주 5량 집이다. 정무공 오정방(1522∼1625), 천파공 오상(1614~1672), 충정공 오두인(1624∼1689) 등 해주 오씨의 이름난 학자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안성 정무공 오정방 고택이 위치하는 덕봉마을은 사액서원인 덕봉서원과 오정방 고택, 종친의 무덤이 모여 있어 해주 오씨의 역사를 보여준다. 오정방의 손자인 오핵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택은 덕봉리 입향조 오현경에 의해 1510년에 처음 지었으며, 1650년에 현재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사랑채에 걸린 ‘퇴전당[退全堂]’이라는 현판은 오정방의 호를 1662년에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새긴 것이라고 한다. 이 가옥은 문간채가 전면에, 그 안쪽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있으며 사랑채 뒤쪽으로 사당이 별도의 담장을 두고 자리한 구성을 하고 있다. 이 가옥은 건립된 시기와 경위가 잘 기록되어 있으며, 16세기에 건립된 원래 모습이 지금까지 남아있지 않더라도, 건물의 목재를 다듬은 상태가 좋으며, 안채의 툇마루와 부엌의 다락에 달아둔 창호에서 높은 수준의 목조건축 기술을 보여준다. 사랑채에 기둥의 모를 깎아 팔각으로 사용하는 방식은 용인 한산이씨 음애공파 고택의 사랑채에서도 나타나는 방식으로 유사한 시대에 인근지역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안성 객사 정청

안성 객사 정청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보개면 종합운동장로 203

객사는 가운데에 지붕을 높인 정청을 두고 좌우에 동헌과 서헌을 건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청은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는 공간이며, 동서헌은 지방에 파견 중인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는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설날, 임금 탄신일, 매달 보름과 그믐에 임금에게 인사드리는 의식을 치렀다. 궁궐에서 의식을 치르는 같은 시간에 각 고을에서는 수령과 아전을 포함한 모든 관리들이 객사 정청 마당에 모여 전패를 향해 인사를 드렸다. 임금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서도 객사 정청에서 선포되었다. 따라서 객사는 각 고을에서 가장 중요한 건물이었고, 고을의 중심에 있었다. 안성객사는 1363년(고려 공민왕 12) 이전에 건립되었으며, 현존하는 객사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국력이 약해진 1906년부터 전국의 객사는 서서히 폐지되었고, 건물은 학교로 사용되었다. 안성객사도 1908년부터 안성보통학교(현 안성초등학교) 교사로 사용했다. 1931년에는 현 명륜여자중학교로 옮겨졌고, 1995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1842년 경 편찬된 경기도 군현의 읍지인 『경기지』에는 안성객사가 정청이 6칸, 동헌 12칸, 서헌 8칸, 중문 3칸, 외문 3칸, 행랑 4칸, 경운정 6칸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정청과 동·서익헌만 남아있다. 안성 객사 정청은 사례가 드문 고려 말 조선 초 주심포 건축으로 건축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공포의 구성은 1308년에 건립된 예산 수덕사 대웅전과 비슷하다. 주두는 굽 아래에 받침을 두었고, 살미(기둥 머리 위에서 정면으로 튀어나와 공포를 구성하는 개별 부재)와 첨차(기둥 머리 위애서 벽체 방향으로 공포를 구성하는 개별 부재)는 화려하게 조각했으며, 단면이 항아리 모양인 보를 사용했다. 살미와 살미 사이 중앙에 둥근 모양의 조각을 깎아 놓았는데, 이는 안성 객사 정청에서만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신창리삼층석탑

신창리삼층석탑

2025-06-16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신창리

신창리삼층석탑은 봉국사[奉國寺]로 추정되는 절터에 흩어져 있던 석탑 부재를 모아 1991년에 복원한 고려 후기의 석탑이다. 약 2.18m 높이의 석탑은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올린 형식으로, 하층기단은 일부 부재만 남아 있는데, 면석 모서리와 중앙부에 측면 기둥인 우주와 가운데 기둥인 탱주를 모각했다. 상층기단은 넓은 판석으로 면석을 구성하고 탱주 없이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했다. 탑신에는 우주를 조각했는데, 석탑 복원공사 당시 탑신의 1층 몸돌의 윗면에서 사리를 봉안했던 원형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옥개석은 밑면에 통일 신라 석탑과 달리 층급 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어 옥개석 두께가 얇아지고 낙수면의 경사가 완만하다. 처마선을 따라 전각 부에는 매우 낮게 반전을 표현했다. 상륜부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려시대는 석탑 건립이 증가하면서 단층 기단이 유행했는데, 신창리삼층석탑이 이중 기단으로 건립된 점은 경기도 지역 고려 석탑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기단부 석재의 치석 기법과 옥개석 표현의 위축 등을 통해 고려 후기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흥김씨삼강정문

서흥김씨삼강정문

2025-03-19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고삼호수로 141-30

서흥김씨삼강정문은 조선시대 충신 김충수와 그의 아들 김함의 효행, 그리고 후손의 열 부인 온양 정 씨, 청주 한 씨의 행적을 기록한 정문(旌門)이다. 한 가문에서 충신과 효자 각 1명, 정절 2명이 나왔고, 『삼강행실속록』에 기록됐다. 김충수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죽산에서 왜군과 접전하다가 적에게 붙잡히자 같이 싸우던 아들 김함이 부친을 구하고자 적진에 뛰어들었다가 부자가 동시에 순절했다. 선조 39년(1606) 년 김함의 효를 기려 효자 정문을 내렸고, 숙종 26년(1700)에는 김충수의 충정을 기려 충신 정문을 내렸다. 또, 병자호란에 적을 피해 투신하여 정절을 지킨 김함의 손녀며느리 온양 정 씨와 부군이 중병을 앓자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고 부군을 따라 순절한 6대손며느리 청주 한 씨를 영조 16년(1740)과 영조 13년(1737)에 열부로 명정하고 정렬 정문을 내렸다. 이 정문들은 원래 각각 다른 곳에 세워졌으나 1958년 고삼저수지 관개공사로 인해 현재의 장소로 이전됐으며, 정문과 현판들을 한 군데 모아 보관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본채 주변에는 담장을 두르고 앞에 일각문을 두었으며, 본채는 앞면 4칸·옆면 1칸으로 지붕 선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집인데 앞면에만 홍살이 있다. 잘 정돈된 잔디와 나무들 가운데 담장으로 둘러쳐져 아담하게 놓인 모습이 충절과 효심을 느끼게 한다.

매산리석불입상

매산리석불입상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미륵당길 32-2

안성 봉업사지 인근에 있는 높이 3.9m의 보살상이다. 볼륨감 없이 평평한 돌기둥 같은 신체에 전체적으로 세부를 정교하게 조각하지 않고 높은 원통형의 보관에 사각의 보개(寶蓋 ; 인도에서 귀인의 외출 시에 사용하던 양산을 불상의 머리 위에 갓처럼 씌운 것)까지 얹은 표현은 고려 전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이다. 보개는 이후 변형을 이루면서 충청도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한 불상에 많이 나타나는 고려 전기 불상의 특징이다. 방형의 넓적한 얼굴에는 가늘게 뜬 눈이 수평으로 표현되고 짧은 코에 작은 입을 표현하였다. 얼굴의 세부 표현은 높은 관과 더불어 이 작품의 시대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둥근 어깨에는 왼쪽 어깨에만 다소 두꺼운 법의를 걸쳤는데, 왼쪽 어깨로부터 신체 전면을 덮으며 내려오는 법의는 가슴에서부터 U자형 주름이 계단식으로 표현되었고, 이는 다시 양쪽 다리에서 각각의 U자 모양을 이루며 발끝까지 이어진다. 보살상답게 양 손목에는 팔찌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가슴에서 손바닥을 밖으로 내보인 상태로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있고, 손등을 밖으로 한 왼손은 배에 대고 있다. 원형 보관과 보개로 이루어진 머리장식과 돌기둥 같은 신체 표현 등에서 고려 시대 전기에 충청도와 경기 남부를 중심으로 유행한 대형 석불의 계통에 속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출처 : 국가유산청)

안성도기동삼층석탑

안성도기동삼층석탑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도기동

옛 안성 읍내가 내려다보이는 도기동 입구 언덕 위에 세워진 화강암제 삼층석탑이다. 단층 기단과 3층의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도기동삼층석탑은 단층 기단과 기단 중석이 있고 그 위에 평면 방형의 3층 탑신을 올린 높이 5.4m의 일반형 석탑이다. 여러 개의 장대석(長臺石)으로 조립된 지대석 위에 양 우주(隅柱)만이 모각된 기단을 놓았다. 갑석(甲石)은 1매의 판석으로 조성되었는데,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다. 탑신부(塔身部) 중 1층 탑신석만 여러 장의 석재를 사용하였을 뿐 나머지는 모두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도기동 삼층석탑 기단은 지대석 위에 결구된 기단 위로 올려진 탑신을 고려했을 때, 이중 기단으로도 볼 수 있다. 초층 옥개석(屋蓋石; 석탑이나 석등 따위의 위에 지붕처럼 덮은 돌)으로 보고 있는 석재는 2층 이상 옥개석과 달리 평박하고, 전각부 반전이 표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옥개석은 편평한 석재를 놓아 다른 석탑에서와 같은 조형미를 찾을 수 없는데, 2층 옥개석에는 1단의 옥개층급과 물 끊기 홈이 표현되어 있다. 3층 탑신도 다른 층의 석재와 달리 2매 석으로 구성된 점이 특징이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 시대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로 다른 2개 이상의 석탑 부재를 섞어 건립했을 가능성도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덕봉서원

덕봉서원

2025-09-22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서원로 529-8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기사사화(己巳士禍)에 연루되어 유배 도중 세상을 떠난 오두인(吳斗寅, 1624~1689)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21년(1695)에 건립된 서원이다. 숙종 23년에 임금이 ‘덕봉’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공인과 지원을 받게 되었다. 고종 8년(1871) 서원철폐령 때에도 헐리지 않고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다. 오두인은 1648년(인조26)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직을 두루 맡았다. 숙종 15년(1689) 인현왕후 폐위 후 이세화(李世華), 박태보(朴泰輔)와 함께 이를 반대하다가, 의주로 유배 가는 도중 파주에서 사망하였다. 1694년(숙종20)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덕봉서원은 마을입구 언덕 남동쪽으로 자리 잡고 있다. 경사진 대지의 아래쪽 턱에는 강당인 정의당과 동재, 서재가 있으며 위쪽 터에는 사당인 덕봉사우가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강당이 앞에 있고 사당이 뒤쪽에 있는 배치 형식)를 갖추었다. 사당과 강당은 부재의 사용으로 미루어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동재, 서재는 1940년대에 훼손 되었다가 새로 복원된 것이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도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경앙사

경앙사

2025-10-30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은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의 제자인 월헌 이보림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산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만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희상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정조 24년(1800)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사망 후엔 헌종 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우 선생은 경전을 깊이 연구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전하지도 못하자, 다음을 기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의병운동과 3·1 운동 등 항일운동이 거셌던 시기라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진영 선생은 전우 선생의 제자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각국의 공관과 정부에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보냈으며,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였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1938년 화양동 만동묘 철거를 반대하고 추담별집을 간행, 배포했다. 흰옷과 검은 갓으로 끝까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