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 국내 여행 정보

한국관광공사에서 제공하는 공공데이터를 활용하여 관광 정보를 소개합니다.

용흥궁

용흥궁

2026-02-25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동문안길21번길 16-1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재위 1849∼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철종이 왕위에 오르자 강화유수 정기세가 건물을 새로 짓고 용흥궁이라 이름을 붙였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기둥머리에서 보와 도리가 직교하여 직접 결구되는 민도리양식이다. 용흥궁은 창덕궁의 연경당, 낙선재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을 따라 지어져 소박하고 순수한 느낌이 든다. 경내에는 철종이 살았던 옛 집임을 표시하는 비석과 비각이 있다. (출처 : 국가유산청)

서울 삼전도비

서울 삼전도비

2025-07-21

서울특별시 송파구 삼학사로 136 (잠실동)

병자호란 때 청에 패배해 굴욕적인 강화협정을 맺고, 청태종의 요구에 따라 그의 공덕을 적은 비석이다.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워진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고, 제목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로 되어있다. 조선 전기까지 조선에 조공을 바쳐오던 여진족은 명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급속히 성장하여 후금을 건국하고, 더욱더 세력을 확장하여 조선을 침략하는 등 압력을 행사하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였다. 나라의 이름을 청으로 바꾼 여진족이 조선에게 신하로서의 예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두 나라의 관계가 단절되었다. 결국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은 10만의 군사를 이끌고 직접 조선에 쳐들어와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남한산성에 머물며 항전하던 인조가 결국 청나라의 군대가 머물고 있는 한강가의 삼전도 나루터에서 항복을 하면서 부끄러운 강화협정을 맺게 되었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청태종은 자신의 공덕을 새긴 기념비를 세우도록 조선에 강요했고 그 결과 삼전도비가 세워졌다. 비문은 이경석이 짓고 글씨는 오준이 썼으며, ‘대청황제공덕비’라는 제목은 여이징이 썼다. 비석 앞면의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는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쓰여져 있어 만주어 및 몽골어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 송파구청 홈페이지)

반계선생유적지

반계선생유적지

2025-03-18

전북특별자치도 부안군 보안면 반계로 97-68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의 유적이다. 선생은 1648년 2차례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효종 4년(1653)에 이곳으로 이사한 후 일생을 숨어 지냈다. 선생은 뛰어난 학문으로 거듭 벼슬자리를 받았으나 모두 사퇴하고, 평생을 학문에만 힘을 쓰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곳에서 그는 『반계수록』26권을 펴냈다. 선생의 학문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는데, 선생의 주된 저서인 『반계수록』에서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을 펴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김제 벽골제

김제 벽골제

2026-05-27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시 부량면 벽골제로 442

김제 벽골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쌓아 만든 옛 저수지의 중수비와 둑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흘해왕 21년(330)에 ‘처음으로 벽골제를 만들었는데, 둘레가 1천8 백보’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지역이 신라 땅이 아닌 백제의 땅이었으므로 나중에 연도를 고쳐서 신라가 만든 것처럼 보이도록 해놓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실제로 만들어진 때는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이후 신라 원성왕 6년(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 21년(1143)에 고쳐 쌓은 후, 조선 태종 15년(1415)에 다시 쌓았다. 1420년(세종 2년)에 큰 폭우로 유실되었다. 지금 유적에는 일직선으로 약 3㎞ 정도의 둑만이 남아있는데, 1925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이 둑을 농사짓는데 필요한 물을 대는 통로로 고쳐 이용하면서 그 원래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리게 되었다. 둑의 북쪽에는 조선 시대에 벽골제를 다시 쌓고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세운 비석이 있는데, 닳아서 글을 알아보기 어렵다. 1975년에는 저수지 물의 양을 조절하던 수문이 있던 자리 2곳을 발굴 조사하였는데, 그 결과 대규모의 높은 수준의 측량 기술이 이용된 공사였던 것이 밝혀졌다. 벽골제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초의 저수지라는데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에 이미 이러한 저수지 축조가 가능할 정도의 고도로 발달된 토목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는 점에서, 우리나라 과학기술사에서도 획기적인 사실을 제공해 주는 유적이다.

정송강 유적(식영정·송강정)

정송강 유적(식영정·송강정)

2024-05-02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59

정송강 유적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철이 성산에 와 있을 때 머물렀던 곳으로, 송강정과 식영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철은 호가 송강으로 27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그 뒤로 많은 벼슬을 지내다가 정권 다툼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성산에 내려와 성산별곡, 사미인곡 등의 문학작품을 지었다. 송강정은 앞면 2칸, 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옆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식영정은 앞면 2칸, 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송강정과 마찬가지로 팔작지붕이다. 한쪽 귀퉁이로 방을 몰아붙이고 앞면과 옆면을 마루로 만든 점이 특이하다. 식영정 근처에 환벽당도 정송강 유적에 속하나 지역상으로 광주에 속하여 문화재 지정번호가 분리되었다. 식영정 건너편에 있는 환벽당은 어린 시절 정철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한 사촌 김윤제가 기거했던 곳으로, 아직도 옛 정취를 그대로 담고 있는 곳이다. 식영정과 송강정은 차량 이동 15분정도 이다.

안동 의성김씨 종택

안동 의성김씨 종택

2025-12-09

경상북도 안동시 임하면 내앞길 1-11

안동 의성 김씨 종택은 청계 김진의 종갓집으로,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졌던 것을 학봉 김성일이 다시 지은 것이다. 16세기말 김성일이 사신으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온 후 북경의 상류층 주택을 본떠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구조와 배치가 매우 독특하다. 안채와 사랑채는 모두 1.6m 정도 높이의 기단 위에 세워져 바깥채보다 높이 자리한다. 다른 주택과 달리 안채의 안방이 사랑채보다 바깥쪽에 있고, 사랑채는 별채처럼 외진 곳에 있어 손님이 행랑채의 대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사랑채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채에 딸린 부속채는 2층으로 되어 있어 위층은 서고로, 아래층은 헛간으로 쓰였다.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경주 정혜사지 십삼층석탑

2025-09-09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통일신라시대 특수한 형태의 석조 불탑이다.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 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 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가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만이 남아있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들풀미술학교

들풀미술학교

2023-02-10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대산길 265-6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건네주는 숲속의 들풀미술학교는 고단한 삶을 뒤로하고 잊었던 자연의 품안에서 인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정적의 공간이다. 삼천평의 대지에 찻집과 민박이 소박하게 자리하고 주변 곳곳에 조각상이 놓여 있는 작은 조각 공원이 있다. 천혜의 자연경관과 어우러진 들풀미술학교에서는 도자기 체험과 천연염색, 녹차시음, 농촌체험 등 각종 현장교육을 받을 수 있는 학교이다.

전주 이강주

전주 이강주

2025-08-08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덕진구 매암길 28 (원동)

이강주는 조선시대 3대 명주의 하나로 전통 소주에 배와 생강이 들어간다고 해서 이강주라 불리게 되었으며 향토문화재로 지정된 25도의 약소주이다. 이강주를 ‘고아내려 만든다’라는 의미로 이강고라고 부르기도 한다. 백미와 누룩으로 빚은 약주를 증류한 뒤 배, 생강, 울금, 계피와 꿀을 넣어 숙성시킨다. 배의 청량한 맛과 톡 쏘는 향, 달콤하면서도 매운 계피의 독특한 향취가 어우러져 알싸하면서도 부드럽다. 조선 시대부터 상류층에서 즐겨 마셨던 고급술로 다양한 문헌에서 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조선 순조 때 문신 이해응은 <계산기정>에서 조선 최고의 술 중 하나로 이강주를 추천했고, <동국세시기>와 <경도잡지> 등에도 우리나라 5대 명주로 이강주가 등장한다. 조선 3대 명주로 꼽힐 만큼 유명했던 이강주는 일제강점기 가양주 말살 정책으로 밀주로 전락하고 해방 이후에도 쌀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순곡주 생산이 금지되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 갔다. 그러던 중에 정부가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을 대표할 술 제조자를 발굴하는 작업을 시작했고 이강주, 문배술, 안동소주 제조자 세 명을 향토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이강주는 조정형 명인(전라북도 무형문화재)에 의해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이강주는 2022년 6월 세계 3대 주류 품평회인 <영국 2022 ISC(International Spirit Challenge)>에서 금상을 받으며 우수성을 인정받았다. 영국과 네덜란드에 직판장이 있고 한류 열풍을 타고 미국, 캐나다, 싱가포르 등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주암댐지석묘군

2026-02-19

전라남도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 부르며 선돌과 함께 거석문화의 하나로 무덤이나 제단 등으로 사용되었다. 고인돌은 유럽, 북아메리카, 지중해 연안, 아시아 등 거의 세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으나 각 지역마다 형태가 조금씩 다르다. 우리나라에서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형태로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에 분포되어 있으며 그중에서도 전남지방에 2만여 기 이상이 분포하고 있어 세계적으로 가장 밀집된 지역으로 주목받고 있다. 고인돌 공원 안의 주암댐지석묘군은 1986년~1987년에 걸쳐 주암댐 수몰지구 내에서 발굴조사된 고인돌 중에서 형태상으로 양호한 99기를 옮겨다가 순천시 송광면 우산리 고인돌 공원에 이전 복원해 놓은 것이며 뒤에 추가로 옮겼는데 발굴된 고인돌을 보존하고 학술 자료 전시를 통한 후세들의 교육용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주암댐지석묘군 주변으로 신석기시대움집, 송주곡천유적, 청동기시대움집, 고인돌전시관, 유물전시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