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M 2024-06-04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서원로 601-76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에 위치한 낚시터로 고성산 계곡수가 유입되는 1급 수질을 사용한다. 주 어종은 잉어, 향어, 송어로 떡밥, 어분, 루어 등을 미끼로 사용한다. 휴게실, 식당, 매점, 부교, 잔교, 수상 방갈로, 연안 방갈로가 있다. 김치찌개, 된장찌개 등 12개의 메뉴가 집밥처럼 나오는 식당의 메인은 토종닭 백숙이다. 가까이에 조선 시대 교육기관이었던 덕봉서원이 있다.
781.7M 2025-03-18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만세로 667
031-672-4728
경기도 안성 양성면 교외에 자리 잡은 곱창전골 맛집이다. 이 식당은 30년 전통을 자랑하고 있다. 특히 곱창의 특유의 냄새도 없어 곱창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에게는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다. 매콤한 곱창전골 육수에 필수코스인 면사리를 추가해서 먹고 난 후 마무리로 먹는 볶음밥이 이 집의 별미이다. 대기하는 손님들이 많으니 방문 시 기다림은 필수이다.
816.2M 2025-01-15
경기도 안성시 만세로 673 궁중해물탕
궁중해물탕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에 있는 해물탕 해물찜 전문점이다. 해산물을 직접 공수하고 관리하여 신선하다. 대표 메뉴는 해물탕과 해물찜이다. 이외에도 아귀찜, 전복뚝배기, 산낙지, 해물칼국수, 왕새우튀김 등을 판매하고 있다. 밑반찬은 셀프바에서 직접 가져다 먹을 수 있다. 매장 내부는 넓고 쾌적하다. 단체석이 있어 모임을 하기 좋다. 대기 손님을 위한 공간이 따로 있다. 매장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TV 방송에 맛집으로 다수 소개되었다.
853.9M 2025-03-19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6
이 한옥 민가는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서 한 채로 건립한 것으로 형태는 곱은 자형에 1 고주 5량 집이다. 사랑채 뒤에는 2칸 사당이 있고, 본래의 사랑채는 없어졌다고 한다. 건립 연대는 약 2백 년 전까지로 올라갈 수 있으나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전면적인 보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는 안채만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본래 이 집은 중종 5년(1510)에 처음 세운 이후 정무공 오정방(1588~1634) 천파고오상에서 충정공 오두인(1624~1689)에 이르기까지 해주 오 씨 명인들을 배출한 유서 깊은 곳으로 전해 내려 온다. 특히 충정공은 이 집에서 성장하여 나라에 크게 공훈을 떨친 바 있어 우암 송시열이 편액을 써서 보내오기도 했다고 한다. 당초에는 덕봉리 252번지에 세워졌던 것이나 효종 1년(1650)에 현 위치로 이전해 왔다고 하며 건물은 1935년에 중수한 것이다. 현재의 건물은 대지 740.49m²(224평)에 사당 18.57m²(5.62평), 안채 102.87m²(31.12평), 사랑 102.87m²(6.52평) 규모의 3동이 자리 잡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치목수법, 건물의 배치 및 구성 수법이 우수하여 조선 중·후기의 주택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860.0M 2024-06-14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108
조선 숙종 때의 문신으로 인현왕후의 폐위를 반대하다가 기사사화에 연루되어 의주로 유배 가는 도중 세상을 떠난 오두인의 충절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21년(1695)에 건립된 서원이다. 숙종 23년(1697) 임금이 덕봉(德峰)이라는 현판을 하사하여 사액서원으로 승격됐다.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살아남아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이며,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해 왔다. 덕봉서원은 큰 규모는 아니지만 건물이 훌륭하고 공간도 매우 짜임새 있게 구성되어 있다.경내의 건물로는 6칸의 사우, 10칸의 정의당, 동재·서재·외삼문·내삼문·홍살문 등이 있으며, 사우에는 오두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덕봉서원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는데 경사진 대지의 아래쪽에는 공부하는 강당인 정의당과 동재, 서재가 있으며 위쪽에는 사당인 덕봉사우가 위치하여 전형적인 전학후묘 배치를 갖추었다. 사당과 강당은 사용된 부재로 봤을 때 19세기의 건물로 추정된다. 동재, 서재는 1940년대에 훼손되었다가 1984년 복원했고, 1979년 사우를 중건했다.
880.3M 2025-03-18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길 68-5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며 500년 동안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지내온 ‘산신제’ 500년의 역사 동안 해주오 씨를 명가로 만들었던 훌륭하신 선대 조상님들의 흔적. 훌륭한 분들의 정신을 존경하고 계승하기 위해 매년 올리는 재례가 있다. 마을 뒤 고성산 아래 풍수지리의 삼수혈을 따라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풍수지리의 마을이며, 선대 어르신을 공경하는 후손의 마을이 가득 담긴 19개의 크고 작은 묘역들과 선비 정신으로 충, 효, 예를 지키며 살아온 마을의 전통 관습 등 옛 모습 그대로 잘 보존된 마을이다. 예전부터 해주오 씨가 모여 살던 해주오 씨 집성촌으로, 관련 문화·역사 자원을 비롯해 빼어난 자연, 생태 자원 및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또 3·1 운동의 본거지로 근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마을이며, 안성선비마을은 선비정신과 문화, 역사를 소중히 간직하고 지키며 살고 있다. 그 중심에 해주오 씨 문증의 '조상과 가족을 위하는 마음'이 있는 곳이다.
955.7M 2024-02-07
경기도 안성시 구장길 8
옛날오리는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에 있는 오리요리 전문점이다. 오리 로스, 오리주물럭, 로스반 주물럭반을 판매하고 있으며 잡내가 나지 않아 신선하고 깔끔한 맛으로 인기가 많다. 또한, 추가 메뉴로 버섯 추가, 볶음밥, 공깃밥 등을 주문할 수 있다. 주문 시 쌈 채소와 정갈한 밑반찬이 함께 나온다. 쌈 채소는 직접 재배한 것으로 신선하다. 부족한 쌈 채소와 밑반찬은 셀프 코너에서 가져다 먹을 수 있다. 매장 내부는 넓고 쾌적하다. 매장 앞에 넓은 주차장이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1.1Km 2025-03-18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구장리
양성면 구장리 마을 입구에 수백 년 된 느티나무 옆에는 미륵불로 신봉되고 있는 '석조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에 이 마을이 형성되면서 남녀 한 쌍의 미륵불이 홍수로 떠내려 가 덕봉 1리 입구에 묻혀 있으며 현재는 남자 미륵만이 이곳에 있다고 전해 오는데 풍화도(風化度)나 미륵의 도상(圖像)으로 볼 때 근대에 새로 모신 불상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양성면 석조여래입상은 화강암 판석을 다듬어 주형광배(柱形光背)를 갖춘 여래입상으로서 고부조(高浮彫)로 조각한 것으로 큰 눈과 납작한 코와 튀어나온 일자 입술, 짧은 턱, 늘어진 귀를 갖춘 다소 갸름한 얼굴에 소발(素髮)의 육계를 보이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고 각이 진 어깨와 더불어 신체에 비해 팔과 손이 유난히 가늘고 작아 왜소한 느낌을 주고 있다. 또 수인(手印)은 오른손으로 시무외인(施無畏印)을 짓고 왼 손으로는 여원인(黎元印)을 짓고 있는데 본래 신체보다 앞으로 나와야 할 수인 자체를 신체와 붙여서 부조로 조각하여 어색해 보인다. 불신(佛身)에 걸쳐진 통견의 법의는 양팔에서 계단식 주름을 형성하고 복부에서는 U자형 의문을 형성하고 있다.
1.2Km 2024-07-08
경기도 안성시 만세로 735
별난매운탕은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동항리에 있는 한식당이다. 안성동항지방산업단지 인근에 있다. 대표 메뉴는 버섯육개장이다. 진하고 매운 사골 국물에 느타리, 팽이 등 다양한 종류의 버섯과 당면, 야채를 듬뿍 넣고 돌솥에 펄펄 끓여 낸다. 이외에도 버섯불고기, 메기매운탕 등의 메뉴를 판매하고 있다. 모든 메뉴는 포장할 수 있다. 매장 내부는 넓고 쾌적하며, 모두 입식 테이블이다. 단체석도 있어 모임하기 좋고, 매장 앞으로 넓은 주차장이 있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안성 3.1운동 기념관이 가까이에 있다.
1.3Km 2024-10-31
경기도 안성시 양성면 덕봉리
경앙사는 오진영 선생의 문인들이 조선 후기 대표적인 성리학자인 노주 오희상을 비롯해 간재 전우, 석농 오진영 선생의 학덕과 절개를 기리기 위해 위패를 봉안하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이다. 매년 음력 3월 10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건물의 총 26㎡(8평)로 겹처마 맞배지붕의 한옥이며 홍살문, 삼문, 사당 등이 차례로 배치되어 있다. 특히 현판 액자는 석농의 제자인 월헌 이보림 선생이 썼다고 전해지는데 여기서 경앙은 [高山仰止 景行行止] 즉, 산은 사람을 우러러보고 길은 사람이 많이 다니므로 천하만인에게 존경받는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희상 선생은 일찍부터 학문에 힘써 성리학의 일가를 이루었고, 정조 24년(1800) 세자익위사 세마가 된 후 여러 차례 벼슬을 하다가 사직하고 광주 징악산에 은거하면서 성리학 연구에 힘썼으며 사망 후엔 헌종 7년(1841)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전우 선생은 경전을 깊이 연구해 당대 최고의 학자라는 평을 들었으며 을사늑약 때 을사오적의 참형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를 전하지도 못하자, 다음을 기약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의병운동과 3·1운동 등 항일운동이 거셌던 시기라 이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개의치 않고 계화도에서 수많은 제자를 가르치고 6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오진영 선생은 전우 선생의 제자로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각국의 공관과 정부에 부당함을 알리는 글을 보냈으며, 이수홍과 파리 만국회의에 보낼 공문을 작성하였으나 전달에 실패했다. 1938년 화양동 만동묘 철거를 반대하고 추담별집을 간행, 배포했다. 흰옷과 검은 갓으로 끝까지 항일의 뜻을 굽히지 않았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